카트는 욕망을 싣고

보통 사람의 평범한 가계부_4. 식비

by 단아정담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엥겔 계수'는 '생계비 가운데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엥겔(Engel, Ernst)은 1857년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가계지출 총액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엥겔 법칙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소득이 낮더라도 일정 금액의 식비는 반드시 지출해야 하며, 아무리 소득이 높아지더라도 식비가 높아지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4년 4/4분기 가계동향조사를 살펴보면,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521.5만원입니다. 가구당 월평균 지출 391만원 중 소비지출은 290만원이고, 이 중 식료품/비주류음료에 대한 소비지출은 42만 3천원으로 소비지출의 14.6%를 차지합니다. 외식과 배달음식 비용인 음식 지출은 43만 9천원입니다. 식료품/비주류음료, 외식과 배달음식에 대한 지출은 86만 2천원이고, 전체 소비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6% 정도 되네요.


엥겔 법칙이 맞는지 소득별로 볼까요? 소득 1분위 가구(하위 20%)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138만원인데, 이 중 식료품/비주류음료는 29.2만원, 음식/숙박은 17.7만원입니다. 두 항목 합쳐 46.9만원으로,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3.9%입니다. (분위별 통계에는 음식/숙박 비용이 구분되어 있지 않으나, 전체 평균에서 음식 지출이 43만 9천원인데 반해 숙박은 1만 5천원으로 대세에 지장 없어 보입니다) 소득 5분위 가구(상위 20%)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490만원인데, 식료품/비주류음료가 59.5만원, 77.4만원입니다. 두 항목 합은 136.9만원, 전체 소비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7.9%입니다. 절대적인 금액은 5분위 가구가 높지만, 엥겔 법칙대로 1분위 가구는 평균보다 높은, 5분위 가구는 평균보다 낮은 비중으로 식비를 사용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여행도 많이 갈 테고 숙박비도 높아질테니 5분위 가구의 실제 식비비중은 더 낮아질 가능성도 있겠네요.


제가 식비를 왜 이렇게 자세히 살펴볼까요? 네, 제 가정의 식비 지출 규모가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좋은 재료를 사는 것도 파인 다이닝으로 소문난 식당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늘 많이 나옵니다.




제 가정의 식비와 외식/배달비, 여행비는 월평균 지출의 22.3%입니다. 식비에는 주류와 생활용품이, 여행비에는 항공료가 포함되어 있어 통계청 자료와 기준은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 식재료 구입비, 외식비와 배달음식 비용이니 크게 차이는 없을 듯 합니다. 저에게 식비는 총액의 단위가 커서 부담스러운 금액인데, 다들 이 정도는 먹고 사는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먹고사는 비용이 이렇게나 많이 드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봅니다. 5년 전만 해도 고기 포함해서 카트 적당히 채우면 25만 원 내외, 많이 샀다 싶으면 35만 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물가가 많이 오른 건지 저희 손이 커진 건지 적당히 샀다 싶으면 35만 원, 많이 샀다 싶으면 50만 원 가까이 나옵니다. 제가 아끼지 않는 품목은 소고기와 과일, 배우자가 주로 보는 품목은 옷과 생활용품, 아이가 선호하는 품목은 냉동식품과 빵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겹치는 품목이 없는지요. 이런 걸 로또라고 하나요?!


주중에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살림하시며 거의 매일 장을 보세요. 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시기 시작하실 무렵에는 제가 주말마다 장을 봐두었는데도 불구하고 평일에 매일 카드 알람이 울렸습니다. '어제 장을 봤는데, 냉동실에 고기도 연어도 있고 냉장실에 과일도 야채도 있는데 도대체 뭘 사신 거지' 하면서 집에 가서 보면 건강에 좋으니 먹어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그러나 저희 가족은 잘 먹지 많는 두부와 가자미, 오리고기 같은 것들을 사시더라고요.


매일 울리는 카드 알람에 스트레스 받던 중, 어느 날 어머니와 대화하다가 슬쩍 말씀 드렸습니다. 장 보러 다니기 힘들지 않으시냐고, 주말에 장 봐두는데 그냥 편하게 집에 있는 재료 쓰시고 대충 요리하셔도 된다고 말이죠. 어머니는 요리하다 보면 또 필요한 게 생긴다고 하시며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돈 안내는 카드를 쓰니 재미있더라." 그 말을 들은 저는 한동안 머리가 멍했습니다. 저희는 그 돈 벌려고 밤 늦게까지 일하는데,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아둥바둥하는데, 본인이 결제 안 하신다고 카드 쓰는 게 재미있다니요!


그래서 주말마다 장보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카드 쓰는 게 재미있어서 쓰신다는 분을 무슨 수로 말리나요. 제 아이를 봐주러 오시는데, 그 정도 재미는 있으셔야죠. 그래서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고기와 생선, 냉동식품 위주로 장을 보고 양파와 감자 같은 식재료는 사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재미를 위해서요. 제가 사 둬도 무언가를 계속 사실테니, 차라리 필수품을 사두지 않는 편이 낫더라고요. 어머니의 카트에는 아들과 손자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과 내 돈 안 쓰고 소소한 쇼핑하는 재미가 더해지나 봅니다.




주말은 배우자와 아이의 욕망이 충돌하는 날입니다. 주중에 계속 식당밥 먹는 배우자는 집밥을, 집밥 먹는 아이는 외식을 원합니다. 저는 점심은 밖에서 먹지만 저녁은 종종 집에서 먹으니, 둘 다 괜찮습니다. 주중에는 직접 요리를 하지 않으니, 주말에 한두끼 정도 해 먹어도 좋고요.


토요일 아침부터 아이는 식당을 외치고 배우지는 집밥을 외치니 제가 중재에 나서봅니다. 아이에게는 건강을 위해 최대 하루에 한 번만 식당 음식을 먹자고, 배우자에게는 주중에 계속 집밥 먹은 아이의 지겨움도 헤아려 한 끼 정도는 기분좋게 외식하자고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둘이 쿵짝이 맞아 메뉴를 잘도 고릅니다. 같이 좋아하는 초밥은 단골 외식메뉴고, 가끔 분위기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도 가고 피자 픽업도 하고요. 때때로 배민으로 족발을 주문하고 오토바이가 어디쯤 오고 있나 지켜봅니다.


제 취향은요? 엄마들의 취향은 늘 한결같습니다. 남이 해주는 밥은 언제든, 무엇이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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