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의 평범한 가계부_3. 고정비용
저는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잠시 기숙사나 학교 앞 작은 방에서 지낸 적이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자취 또는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직접 음식을 해 먹지도, 빨래도 하지 않았고 관리비를 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평일에 잠만 자는 곳이었어요. 직장에 다니면서도 완벽한 캥거루족이었습니다. 집에서 회사까지 한 번에 가는 대중교통 편이 있어 출퇴근에 불편함이 없었고, 잠시 독립할까 했으나 회사 근처 월세가 너무나 높아 몇 군데 둘러보다가 부모님 집에 눌러앉았거든요.
저의 독립은 결혼생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식 전날까지 부모님 집에서 머물렀고, 신혼여행 다녀와서야 신혼집으로 들어갔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첫 날, 그 하루가 그렇게 낯설 수 없었습니다. 여행 다녀오자마자 빨래를 해야 했으니까요. 결혼하기 전에는 여행 다녀오면 트렁크를 열어 빨래통에 빨래를 넣어두면 끝이었던 생활이었는데 말입니다. 집에서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 10년이 지나도 생각하는 날이죠.
생경한 것은 여행 후의 빨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달랑 둘이 사는 집 하나 유지하는데 돈이 왜 이렇게 많이 들던지요. 매월 관리비며 인터넷비, 통신비는 기본이었고, 때가 되면 자동차세와 주민세 고지서가 날라오고, 겨울이 되자 도시가스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왔습니다. 일년 간은 통장에서 우편함에 종이가 꽂혀있을 때마다, 자동이체 알람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관리비 고지서를 그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살았던 집에서는 개별 사용하는 수도료와 전기료를 포함해서 관리비가 부과되었습니다. (오래 전 금액이라) 10만원 내외 나왔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 정도면 낼 만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우편함에 낯선 고지서가 한 장 더 꽂혀있습니다. 온수와 난방에 적용되는 도시가스비가 별도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부담없이 낼 수 있는 수준이지만, 추워지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도시가스비의 반전이지요. 첫 겨울에 10만원 넘는 도시가스비 고지서를 받아들고서 너무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집도 조금 넓어지고 물가도 많이 올라서 월 30만원이 넘는 관리비를 내고 있습니다. 결혼 초에는 전력사용량이 100Kwh 초반대 였는데, 이제는 기본적으로 200Kwh 중반을 찍네요. 식기세척기와 건조기를 들여서인지 전기사용량이 10년 전보다 두 배 가량 늘었습니다. 아이가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에는 에어컨을 매일 틀어, 몇해 전 부터는 여름방학 시즌이면 말로만 듣던 10만원 넘는 전기료도 내고 있습니다. 식구가 늘어나니 수도와 온수 사용량도 늘었고요. 세 식구가 집에서 기본 생활만 해도 최소한 3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갑니다.
통신비도 고정비용입니다. 세 식구 핸드폰 비용에 저희 집과 부모님 댁에서 쓰는 인터넷 두 회선 비용까지 합치니 기본 10만원은 나갑니다. 요즘 알뜰폰으로 몇 천원 요금제 쓰시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저희는 사정이 있어 그렇게는 못 하지만, 장기가입, 가족결합, 인터넷과 핸드폰 결합, 선택약정 등 할 수 있는 할인은 다 받아보려고 노력합니다.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것도 비싼 요금제를 쓰는 것도 아니라서 평소에는 요금 부담이 덜 하지만, 간혹 핸드폰을 새로 사게 되면 기계값이 어마어마 합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는 새 것 같은 중고기계를 사봤는데, 확실히 요금 절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실비/종신보험도 고정비용으로 분류해 봅니다. 저는 회사에서 단체보험을 들고 있어서 배우자와 아이의 실비보험만 가지고 있습니다. 종신보험은 제 것은 납입이 끝났고, 배우자 것만 8년 정도 남은 것 같아요. 10년 넘게 돈을 내다 보니, 건강할 때는 아깝고 아플 때는 아쉬운 것이 보험료더라고요. 비상 시에 돌려받아 요긴하게 쓰기 위해 납입하지만, 돌려받을 일이 없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마음 편한 값이다 생각하면서 꾸준히 내고 있어요.
최근 새로 생긴 고정비용은 구독항목 입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기저귀와 분유를 시작으로 온라인 배송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쿠팡의 멤버십 가입은 돈이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일반배송은 너무나도 느린 미국에서 아마존 프라임의 신세계를 맛보고 한국에 돌아와 바로 쿠팡 와우 회원에 가입했었죠. 지금은 와우멤버십 비용이 너무 높아져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온라인 배송은 꾸준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쇼핑몰 구독과 더불어 OTT (Over-the-Top) 구독도 이제는 일상화 되었지요. OTT 비용도 늘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가족용으로 넷플릭스 한 개는 고정 구독하고 있지만, 다른 채널은 무료가입 기회를 쓰거나 정말 보고 싶은 컨텐츠가 있을 때 한 달만 이용하고 중지합니다. OTT는 비용을 떠나서 많이 구독할수록 시간을 잡아먹는 것 같아 가급적 늘리지 않으려고 해요. 여행 프로그램 보는 것보다 뒷 산에라도 올라 풀냄새 직접 맡는 게 낫고, 맛집 프로그램 보는 것보다 소박한 요리라도 직접 장보고 만들어먹는 경험이 저에게는 더 가치있기 때문이에요.
가족들의 둥지인 집을 유지하는 관리비, 현대사회 필수품인 핸드폰과 인터넷 사용에 필요한 통신비, 비상시에 대비하는 보험료, 최근 추가된 구독비가 제 일상의 기저에 깔려있는 고정비용입니다. 불편함 없이 일상을 지내는데 있어 공기처럼 필요한,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직장과 학교에 다니면서 숨만 쉬고 살하도 늘 비슷하게 지출되는 비용이더라고요.
재무전문가라는 분들은 고정비용은 월 수입의 10%를 넘으면 안된다, 보험은 15% 이하로 하는 것이 좋다 등등 말씀하시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요. 100만원 벌어도 빠른 모바일 환경이 중요하면 무제한 요금제 쓰고, 500만원 벌어도 핸드폰 조금 늦게 로딩되는 것이 괜찮으면 저렴한 요금제 쓰는 거지요. 하루라도 우유 계란 없으면 안되는 분들은 쿠팡 와우멤버십 쓰고, 하루 정도는 우유 계란 없어도 되는 분들은 4만원 장볼 것 모아 SSG 쓰는 거고요.
다만, 한 번 정해놓으면 꾸준히 나가기 때문에 생활에 부담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관리비는 세대 내 전기, 수도, 가스비 빼고 아파트에서 일괄 부과하기 때문에 조정하기 어렵지만, 통신비와 보험료, 구독비는 스스로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맞추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더라고요. 보험료는 제 종신보험 납입이 끝나서 부담이 조금 줄어든 후에 아이 보험을 정비했고, 통신료와 구독비도 늘지 않도록 일년에 한두 번은 점검하고 있어요.
고정비는 관성이 있어 쓰던 것을 줄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한 번 줄여놓으면 또 그대로 지낼 수 있기 때문에 가계부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산소를 너무 많이 흡입해도 좋지 않은 것처럼, 공기 같은 고정지출 역시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관리하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