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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May 17. 2021

'노동당원' 아버지의 딸을 위한 선택




나의 아버지는 '노동당원'이었다.



저의 아버지는 오랜 '노동당원'이셨습니다. 아버지의 32년간의 당 생활은 진실과 책임과 참됨이 모두 녹아있는 본보기의 삶이었습니다. 늘 당과 국가가 먼저였고 개인보다 전체의 이익을 위한 일이 우선이셨습니다. 


한국에서는 북한의 노동당원이면 굉장한 권력층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원에도 급(직급)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당원들을 통제하는 사람은 비서입니다. 비서는 가장 말단인 당세포비서와 2~3개의 세포가 모여 이루어진 부문당비서,  몇 개의 부문당이 모여 구성된 초급당비서, 그리고 기타 상급 당비서들이 있습니다. 초급당비서부터 유급 당비서이여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로 진짜 당비서인 거죠.


평범한 일반당원인 경우는 사실 당원이라는 소속감 때문에 당을 위하여 몸이 부서지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급여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닌 단순한 명예뿐인거죠. 예전에는 이 명예 때문에 당에 입당하는 것을 내 인생 최상의 과제로 생각했지만 최근 북한에서는 당원이 되는 것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에 입당하면 일만 많이 해야 하고, 시간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남녀가 선을 볼 때 첫 번째 질문이 “당원이요?”라고 묻는 것일 정도로 당원에 대한 북한사회의 열망과 신뢰는 대단했거든요. 당원이 대단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경우는 초급당비서 이상의 당비서인 경우에만 해당되거든요. 

저의 아버지가 바로 당원의 최 말단 단위인 당세포비서셨고요. 권력층도 아니고 보상도 없었지만 당원이라는 명분 하나를 갖고 최선을 다해 그 사회를 섬기셨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살았던 딸이고요. 


아버지는 당원이 되기를 목표로 살아가는 저한테는 가장 멋진 분이셨고 인생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놓아버리신 아버지의 삶의 끈.


아버지의 삶의 마지막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살을 택하신 것이죠. 북한 사회에서 자살이라고 하면 "그게 가능해?" 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듯하네요. 북한은 어떤 이유이든 자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의 끈을 놓는 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심한 경우 반역자의 딱지를 붙이기도 하죠. 

그래서 북한 사회는 자살이 거의 없습니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일성의 사망’이 전 국민에게 알려졌고 이 사건은 엄청한 충격으로 북한 인민들을 페닉 상태에 빠뜨렸습니다. 김일성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야말로 신이었죠.


당시 아버지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의식은 명료하나 거동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하늘의 태양이 사라졌는데 하찮은 내가 살아서 어떡하냐"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여기서 '하찮은 내가' 하는 의미는 당원이시고 누구보다 그 사회에 열심이셔야 할 당신이 뇌출혈 후유증으로 나라에 아무러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미안함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를 부르시더군요. 그러시고는 편지 한 장을 주시면서 저희 병원 초급당비서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와 아버지는 같은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병원에서 허드레일을 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상태였으니 아버지의 직속 당비서는 저희 병원 초급당비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당비서에게 쓰신 아버지의 편지에는 당앞에 자신의 마지막 당 생활을 총화 하심과 함께 자신의 막내딸(저입니다.)을 당에 바치겠으니 당에서 잘 키워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유서 같은 편지를 읽으면서 사실 깊은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을 헌신하여 온 당에 자신의 딸을 바친다는 이런 표현, 이런 편지는 당시 입당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에게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버지는 또 다른 한 장의 편지를 주셨고 거기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주소가 적혀있었습니다. 영문을 몰라하는 저의 두 손을 꼭 잡으시고 근심과 고뇌에 찬 눈빛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악착같이 버티지 말고 힘들면 이곳을 떠나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라. 

                너는 좀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너를 이렇게 홀로 남겨두고 가는 것이 무척 마음이 무겁구나”



상반되는 내용의 두장의 편지,

당에는 딸을 바친다고 하시고, 딸에게는 이곳을 빠져나가기를 은밀히 권고하시다니..

.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조언이었습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셨 그 뒤를 이으려고 당원이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저에게는 아버지가 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이중적인 모습은 충격과 혼란 그 자체였고 아버지한테 심한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많은 것을 여쭤보고 싶었지만  그 말씀을 저한테 하시고 바로 식음을 전 폐하셨습니다. 물한모금까지도 거부하시면서 눈감고 입을 꾹 다물고 계시던 아버지에게서 이후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왜 이러시냐고,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해할 수 있게 말씀 좀 해달라고 하소연했지만 단 한마디도 답변하지 않으시고 삶을 놓아버리셨고 이후의 모든 선택을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원망, 배신, 실망, 그리고 허무함. 무너져내리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지만 당시 환경은 제가 그 상황에 멈출 수 없이 현실로 내몰았습니다. 당시 소아과 입원실 의사였던 나는 매일 생사를 오가는 아이들과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북한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 후, 

내가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을 때,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렇게 간고하게 당부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한생을 바치셨던 사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진실되게 섬기셨던 북한사회의 모순을 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이전에 간파하셨던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딸을 당에 바치고 싶다고 했던 첫 번째 편지는 그 사회에서의 딸의 성공을 위해서였을 거고, 

그 길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과감히 미련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두 가지 가능성을 념두에 두셨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하실 수 있으셨던 말씀은 “기회가 된다면 이곳을 떠나라. 너를 홀로 남겨두고 먼저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자신이 한생을 바쳤던 사회에서 딸의 한생도 뒤 울안의 잡초처럼 스러져갈가봐 무척 걱정하셨던 것입니다. 혹시나, 딸이 기회가 없어서 이 사회에 그냥 남게 된다면 딸의 미래에 다소나마 도움이라도 될까 마음 쓰시어 당에는 내심 마음에 없는 편지를 남기신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진심은 딸이 그 땅을 떠나기를 바라신 것 아닐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딸에게 조차 자신의 마음속을 비치지 않으셨으며 자칫 젊은 혈기에 잘못 행동하다가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게 될까 봐 걱정되셨던 것 아닐까 싶어요. 고집이 좀 세고 하나에 꽃이면 완강하게 한곬으로만 직진하는 저의 성격을 고려해 어떤 이유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 당시에는 제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제가 좀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있고 깊은 생각을 불러올 수 있게 할 자신의 삶을 놓아버리는 방식으로 충격요법을 쓰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그런 선택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당에 충성하는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힘들었던 당시의 현실에서 문득문득 저한테 많은 생각을 하며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떤 부모님도 쉽게 하실 수 있는 선택이 아니겠지요
얼마나 고충이 크셨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32년간 성실하게 당 생활하셨던 아버지께서 현실과 이성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하셨을지, 당시의 북한 분위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의 갈등이 얼마나 크셨을지 이제야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딸에게 명확하게 콕 찍어서 답변해줄 수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미련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폭넓은 선택의 길을 열어주신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이 듬뿍 스며있는 그 "숭고한 희생"으로 저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북한을 떠날 수 있었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제 삶이 만족스럽고 제가 만들어가는 저의 미래가 설레고 뿌듯하고 희망적임을 알기에 저를 이곳까지 이끌어주시고 밀어주시고 지탱하게 해 주신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32년의 열성당원으로서의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사랑하는 딸의 미래를 선택하셨습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Mouse23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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