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저의 삶이 이곳까지 오게 된 가장 큰 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헌신적인 사랑, 숭고한 희생" 덕분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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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식에게나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부모 자식 간의 단순한 사랑 그 이상의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추억이 상황에 따라 기쁜 추억일 수도 아픈 추억일 수도 있겠지요.
저한테도 아버지는 늘 미안함과 고마움 혼재된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습니다.
평생을 건설현장에서 벽돌 쌓고 창문틀 달고 수평을 정확히 맞춰서 건물 바닥을 미장하는 고급기능공이셨습니다. 어느 날 건설현장에서 사고가 나면서 다리를 다친 아버지는 육체의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장애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후 제가 있던 병원에서 보일러도 관리하시고 수술 후 나오는 피 빨래도 씻으시는 등의 허드레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저는 같은 병원 소아과 입원실을 맡은 의사였으니 아버지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여유가 있을 때 아버지 일하시는 곳 옆의 작은 휴게공간에서 잠깐씩 낮잠을 자기도 했고 피 묻은 붕대를 손으로 세탁하고 계시는 아버지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주고받군 했었죠. 아버지가 허드 레일을 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었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느껴질 때도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계신 좁은 공간이 저한테는 편안하고 따뜻한 휴식의 공간이었습니다.
일용직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던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어와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에 아주 능통하셨습니다. 해방 전에 중학교를 중퇴하셨으니 일본어는 당연히 잘하셨죠. 북한으로 귀국하시기 전까지 중국 길림성에 살고 계셨으니 당연히 중국어도 아주 잘하셨고요. 어릴 때 기억을 돌아보면 엄마와 아빠가 어린 우리들(언니와 저)이 알면 안 되는 대화를 나누실 때는 두 분이 중국어와 일본어를 아주 자유롭게 섞어서 대화하셨거든요.
중국에 살고 계셨던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북조선 평양에 김일성 종합대학이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공부를 하기 위하여 혼자의 몸으로 평양을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대학공부는 못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매를 맞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당시 할머니께서 멍이 든 아버지에게 '인분'을 발라 독을 빼셨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중국에서 소련으로 벌목을 가셨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소련에서 러시아어를 독학으로 금방 터득하셨고 당시 정식으로는 아니지만 통역일도 간간히 맡아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한 간부의 발탁으로 소련에서 대학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러시아어는 수준급으로 잘하셨죠.
평양에서 김일성 종합대학은 다녀보지도 못하고 소련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는데(당시 중국 길림성에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들을 비롯하여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소련과 연관된 사람들에 대한 탄압도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위가 많이 안 좋으셨던 아버지는 북한에서 병원 치료는 무료라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머니와 언니를 데리고 북한으로 귀국하시게 됩니다.
아버지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많으셨던가 봅니다. 낮에는 일하시고 밤에는 청진에 있는 사범대학에 입학하셨습니다. 졸업을 몇 개월 앞둔 시점에 대학가에 떠도는 소문이 소련에서 있다가 온 사람들은 성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졸업증을 주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니 억울하고 화가 나서 대학교를 중퇴하셨다고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죠. 그런 아버지셨으니 비록 건설현장 노동자로서 허드레 일을 하셨지만 학문적 지식은 충분하셨습니다.
가끔 병원에는 러시아, 독일, 헝가리, 폴란드 의 약들도 납품되기도 했고 일반 주민들도 개별적으로 약을 구해가지고 와서 선생님들에게 설명을 부탁할 때도 있는데요. 담당의사 선생님들이 그 약품 해설을 하기 힘들 경 우 늘 마지막에 보일러공으로 일하시는 저의 아빠에게까지 오면 결론이 나거든요. 러시아어를 아주 잘 하셨던 아버지는 동유럽 다른 나라의 약 병의 해석도 충분히 하셨거든요.
당연히 제가 아빠의 딸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딸에 대한 아빠의 교육은 늘 한 밤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어릴 때 제 학업에도 아빠는 정말 지대한 영향을 주셨습니다. 평상시에 아빠는 말씀이 정말 없으십니다. 원래 과묵하신 성격이셨는지, 살아오시면서 모든 것이 아빠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삶이셨으니 스스로 감정을 마음속에 감추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줄곳, 묵묵히 일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에 대한 관심은 늘 지극하셨죠.
제가 공부를 잘할 수 있게 된 건 명실공히 아빠 덕분입니다. 이불속에서 공부하다가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아빠가 곱게 깎아놓으신 연필들이 필통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책은 잘 정리되어 가방에 넣어져 있습니다. 늘 마음이 단정해지고 제가 수업에 임하는 자세가 올바르게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수업에 임할 수 있었죠.
수업 시작 전 숙제 노트를 펼치면 노트의 한쪽 귀퉁이에 아빠의 흔적이 살아있듯이 스쳐있습니다. 숙제하면서 틀린 부분을 제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손수 하나하나 수정해서 여백에 남겨 주신 거죠. 제가 뭘 잘못했고 어떤 부분을 착각하고 있었는지를 한눈에 깨달을 수 있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늘 "아. 틀렸구나,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였구나"하고 느끼게 되었답니다.
한 번도 왜 틀렸느냐, 왜 이것도 모르느냐 하는 잔소리 같은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늘 아버지께서 정성스럽게 남겨주신 흔적으로 책갈피에서 제가 스스로 잘못된 부분을 찾을 수 있도록 하셨죠.
이것이 아빠의 교육법입니다.
저는 지금도 부모의 잔소리 없이도 자녀들을 공부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늘 아빠와 엄마의 에피소드들을 들려주군 한답니다. 아빠의 교육법은 늘 저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주눅 들게 하지 않았고 제 마음을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힘이었답니다.
책갈피 여백에 남겨주신 아버지의 메모는
저에게 학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이었고,
학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가르침이었고,
미래를 개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참된 교육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정성스럽고 묵묵한 이끌림에 의해 저는 별로 악착같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없었고, 공부를 편하게 대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공부해도 늘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결국 의학대학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권위적인 권고나 압박감을 주지 않으시면서 딸을 잘 키워내시고 딸의 앞날까지도 멋지게 책임져주신 "일용직 나의 아빠는 내 인생의 최고의 스승이시며 축복"입니다.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대문사진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