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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Jun 16. 2021

북한, 남자 친구 '선'과의 연애 - 그 배경(2)

북한의 연애(2)



내 남자 친구의 이름은 ‘선’이다.

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결투는 아니었겠지만 (마음으로는 내심 혹시 정말 치열한 결투 끝에 나를 얻은 것일까? 하는 기대, 궁금함도 있기는 함) 어쨌든 학기초 남학생들은 겹치는 연애를 하지 않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합의를 했고 결국 나는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선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내가 수락한 적은 없으니 자기들만의 암묵적인 약속이었을 터이고 나는 전혀 선이랑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https://brunch.co.kr/@hee91801/109



시일이 지나면서 친구 A와 친구 B는 나에게서 멀어지고 '선이'만 남아있게 되었고 어느 누가 봐도 그의 시선은 나한테로 쏠려 있어었다. 의학대학 내에서는 우리 말고도 하나둘씩 커플들이 생겨났지만 유독 선과 내가 그 관심의 중심에 서있었다. 무릇 젊은 청춘 남녀의 이성 감정이 주변인들에게 약간의 궁금증을 야기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 쏠리는 눈길은 사실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다 말겠지 하는 정도가 아니어서 나도 사실 좀 의아하기는 했다.

게다가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만들어 놓은 이 상황에 자존심이 많이 상해서 '선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으니 우리 둘을 한 묶음으로 세워놓고 바라보고 있는 주변의 상황이나 분위기가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이다.      







우리 집안은 자매이다. 언니는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남자 고등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북한은 한국과 달리 학교 주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그 학교를 다닌다. 우리 집과 언니가 교사로 일하고 있는 학교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결국 우리 동네 남자아이들, 동네 친구들이 우리 언니의 제자인 것이다. 


게다가 언니가 졸업반을 맡은 담임이어서 언니의 학급 아이들과 내가 같은 학년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언니가 교사로 있는 남자학교의 남학생들한테 내가 꽤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절 때면 집안이 미어지듯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인사하러 왔고 그러면 우리 엄마는 교사하고 있는 당신 딸이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며 밥상 차렸다 내리기를 기분 좋게 반복하셨지만 언니는 늘 딴 소리 한마디씩 했다.


 “엄마, 애들이 날 보러 오는 것도 있겠지만 지은이 때문에 오는 것도 있어요.” 하고. ㅎㅎㅎ


담임선생님의 동생이기도 했겠지만 당시 나도 여학생들만 다니는 함경북도 청진 시 포항구역에 있는 포항여자고등중학교에서 꽤 알려져 있었던 터라 늘 선이 한 테 ‘네가 뭔데?’ 하는 마음이 컸었다. 나를 물건처럼 선택했다는 생각 때문에 선이를 이쁘게 봐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른 나이에 의학대학(한국에서는 의과대학이라고 부르지만 북한에서는 의학대학이다.)에 입학했다.

내 또래들보다 1살~2살 어리다. 생일이 상반기인가 하반기인가에 따라 3살 차이 나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한글을 떼기는 했지만 그보다 당시 북한은 10년제 의무교육의 실시를 시작하는 시범단계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들을 골라 1년 정도 앞당겨 입학시키고 관찰하는 시기를 가지게 되었고 나는 거기에 속해서 인민학교를 이른 나이에 입학하게 되었다. 


북한은 한국과 달리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가 4년이고 고등중학교(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5년 과정의 9년제 의무교육이었다. 이렇게 9년 과정을 공부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보통 18살에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내가 1년 빠르게 입학했으니 결국 17살(만 16살)에 의학대학 학생이 된 셈이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어린 나이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의 인식으로는 공개적인 연애를 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두려운 마음이 컸다. 뭐가 두려웠던 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연애를 시작하면 어른들이 욕할 것 같고 인생 망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선'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왜 '선'에게 호의적이지 않냐고 물었다. 그냥 싫다. 왜냐고 했지만 무작정 싫은 마음이라고 했다. 정말이다. 요즘 한국에서 알려지고 있는 밀당이 아니고 그냥 싫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들끼지 만들어놓고 씌워놓은 프레임도 자존심상하고 짜증났고, 나이가 어리다고 나를 아주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그것도 싫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매우 부러운 존재였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선이라는 친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 배경 때문이었다. 초기 나만 몰랐던 '선'이의 후광은 당시 북한의 분위기로는 매우 화려했다.


우선 '선'은 잘 생겼다. 언제인가 앞부분의 글에서 나는 '선'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키가 크고 잘 생겼고 몸매도 좋은 데다 춤도 잘 추는 친구였다. 평양에서 제13차 세계 청년학생축전이 있을 때 청진 의학대학의 무용수로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으며 당시 ‘전대협’ 대표로 북한에 왔던 임수경 씨와 그를 데리러 나중에 들어왔던 정의구현 사제단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에서 단식까지 함께 했었다.



아래의 글에 남자 친구의 이야기가 아주 잠깐 언급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hee91801/17



겉보기에도 훤칠하고 눈에 띄는 것 만으로, 그런 남자의 여자 친구라는 것 때문에 나를 부러워했던 것이 아니라 친구 '선'이 가지고 있던, 나만 모르고 있던 배경 때문이었다.     


친구 '선'은 재일본 조총련계 집안의 아들이었고 그는 청진시(인구 85만 명)에서 5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재력을 가진 집안의 장손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총련은 북한에 엄청난 자금을 보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북한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들은 화교보다 총련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총련 친척들은 한 번씩  고국(북한) 방문할 때 트럭 한, 두 개 정도의 물품들을 싣고 오며 그들이 사용하는 물품은 늘 우리가 사용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선'의 집안이 얼마나 잘 살았느냐 하는 건 그가 당시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가용은 아니었지만 국가 이름으로 등록해놓고 개인이 사용하고 있었다. -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런 '선'의 외가, 친가 모두 총련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북한 정부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집안이었고 특히 친할머니는 일본에서 큰 제화공장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만 모르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었으니 주변에서 나를 부러워할 만했다.     

이제 친구 A, B와의 싸움(^&^)에서 왜 주도권이 친구 C에게로 그렇게 쉽게 넘어갔는지를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러한 '선'의 집안 배경 대문에 더욱더 '선' 에게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돈 보고 마음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 그 또한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참.





Image by Monfocu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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