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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Jul 12. 2021

남조선 트로트는 20대의 나에게 설렘이었다


파출부로 일하던 방황의 시절은 동굴 같은 어둠 속 삶이었다.

 
 새벽 5시 출근

집주인 기상 전  아침 준비하고 식사 차려 드리기, 설거지와 함께 구석구석 청소하고 나면 점심시간이다.

주방 시크대에  서서 대충 점심 식사하고 나면 오후 장 보러 간다.

추우면 추운대로, 무더우면 무더운 대로 낑낑대며 장 보고 와서  식재료 정리 및 저녁 준비, 이어 주인집 저녁식사 마치기를 기다려 설거지 및 아침 준비해놓고 거처로 돌아오면 대략 저녁 8시 정도다.


거처하던 곳은 아파트 지하에 있는( 한국의 지하 주차장 같은 곳) 0.5%남짓한 좁은 공간이다. 

간이침대 1대, 좁은 침대 위에는  지친 나를 따뜻이 품어줄 수 있는 전기 매트 한 장. 수도와 화장실은 공동사용이라 늘 어지럽고 붐비고 소란스럽다, 세수 물도 전날에 대야에 떠다 놓았다가 새벽에 사용한다. 겨울은 히터로 물을 긇여 세수하고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지하 전체가 너무 추워 이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환경이다.


중국의 큰 도시들에는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목소리가 높고 말을 많이 하는 중국인들(비하 발언이 아님)의 특성상 지하는 거의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56개 민족의 언어, 대충 칸막이에 의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각자들만의 공간에서는 사생활도 보장되지 않는다. 눈 감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귀신들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아비규환의 환청에 시달리는,  휴일이라고 해도 제대로 휴식할 수 없는 환경이다.


매일 채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나한테 꿈과 희망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미래가 있는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 외에 내 마음이 기대고 위로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되는 시간은 하루 일 마치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가세트 테이프로 남한의 트로트를 듣는  시간이다. 트로트 테이프를 듣는 시간만큼은 지하셋방에 살고 살고 있는 타인들의 생활소음이 내 고막을 통해 심장과 뇌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시간인 것이다.


가족이 보고 싶고, 신세가 한 탐스럽고, 두려움에 가슴 떨리는 이 모든 고통을 트로트가 극복하게 해 주었다.

구구절절 마음에 꽂히는 가사와 멜로디들은 내가 처한 환경을 위로해주었고 혼자가 아닌, 같은 처지의 도 다른 누구와도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북한 음악에서는 들어볼 수 도, 불러볼 수도 없었던 신기한 음악으로 나를 위로해주었고, 나를 지켜주었고 희망을 꿈꾸게 해 주었다. 한국의 트로트를 이렇게 마음 놓고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테이프가 닳도록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내가 한국에 들어올 때 아마 한국 트로트 500여 곡은 익히고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래방에 가게 되었는데, 지인들이 혹시 내가 한국 노래를 모르지 않을까 싶어 노래방에 몇 개 안 되는 북한 노래를 선곡해주던 기억이 있다. 나는 직접 취소하고 자신 있게 한국 노래를 선곡해서 불렀다. 모두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가끔 노래 불러달라는 청을 받으면 신청곡 얘기해달라고 하기도 할 만큼 웬만한 트로트는 다 알고 있을 정도로 당시 나의 일상은 일과 트로트뿐이었다.



                       < 어느 봄날 한강에서의 선상파티를 마치고 한잔 약주의 기운을 빌어 본 대범함 >







내가 처음 트로트를 접했던 때는 북한의  대학 때이다.

남자 친구가 조총련계였던 관계로 한국음악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남자 친구와 나는 소형 라디오를 가지고 사람이 안보는 으슥한 곳에서 머리 맞대고 시간 날 때마다 한국 트로트를 들었다


북한에서 처음 들었던 트로트는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  조미미(가수 이름은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죠)의 "단골손님",  한명숙 씨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심수봉 씨의 "그때 그 사람"을 비롯하여 "홍도야 울지 말라",  혜은이씨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그리고 제목은 모르지만 멜로디와 가사가 아직까지도 익숙한 "남포동 네거리에는 버스도 많은데. 그 버스, 그 아가씨는 정말 친절해~~" 하는 노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노래가 있었지만 남조선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었다. 

신세계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삶이 있었고, 슬픔도 있었지만 그 슬픔이 치유되는 위로도 있었다. 타인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야릇함도 있었고, 숨막히고 감정이 옥죄이는 듯한 스릴도 있었지만, 때로는 신비한 미래 세계도 있었다.

전투적인 멜로디와 한 사람만을 찬양하는 인위적인 표현에만 익숙되어 있었던 음악에서 이 세상에는 전혀 다른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나는 숨어서 노래를 듣느라 학교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할때도 많았다.


북한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에

"여자는 남자의 기타 소리에 반하고, 남자는 여자의 가야금 소리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한때 북한 젊은이들 속에서는 기타가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다. 특히 대학생활에서 악기 하나 정도, 장기 하나 정도는 꽤 근사한 장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나도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무척 설렌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에 약간 서글픔도 있지만 "백세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다.


기타에 매우 심취해 있던 시기라 그랬는지 김범룡 씨의 "바람, 바람, 바람"의 가삿말은 특별히 마음에 새겨졌다.


"문 밖엔 귀뚜라미 울고 산새가 지저귀는데

내 님은 오시지를 않고 어둠만이 짙어가네

저 멀리엔 기타 소리 귀가에 들려오는데

언제 님은 오시려나 바람만 휑하니 부네


내 님은 바람이런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어둠 속에 잠기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 놓고 가는 바람"



남자 친구를 만나지 않는 날은 늘 이 노래를 집에서 중얼중얼 불렀다.


남자친구와의 신분상 차이가 심했던 나는 늘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조심스러웠고, 불안했고,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정말 이 사람이 내 삶에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바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 너무 마음 주었다가 나중에 감당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나의 이 모든 마음이 이 노래에 담겨 있었다.



                                < 2018.05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북한 노래 "심장에 남는 사람"













지금은 이전만큼이나 트로트를 자주 부르지는 못하지만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 재밋게 시청했다. 

트로트는 북한에서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삶과 함께 했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에서나는 남한의 트로트와 함께 울고 웃었다. 






언제인가 아들이  차에서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물었다.

당시는 "찬송가" 위주로 듣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아들은 씨디 몇 개를 선물해주었다.


1. 팝송 (엄마 정도 되면 우아하게 팝송은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ㅎㅎㅎ)

2. 트로트 ( 엄마에게 그닥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주 신나고 싶거나 아주 우울할 때 가끔은 들어야 한다면서. ㅎ)

3. 어린이 노래 ( 울적하고 답답할 때 동심으로 돌아가게 되고 마음이 순수해질 거라고 하면서. ㅎㅎㅎ)

4. 가요( 아들이 듣는 음악을 가끔 함께 들으면서 좋다고 했더니 그 곡들만을 따로 골라서.)


   직접 선곡해서 만들어 준 그 과정에 무한 감동 받았다.

   한곡 한곡 선곡하면서 엄마의 취향을 생각한 것이겠지.

   엄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


   고마운 아들.

   사랑한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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