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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Sep 06. 2021

맞선 보러가는데 같이 가줄래?-남자 친구가물었다 (5)

북한의 연애



https://brunch.co.kr/@hee91801/130




어느 날 문득 남자 친구가 찾아왔다. 헤어지고 2년은 되었다.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전공실습이 많아 얼굴 보기 힘든 것도 있었고 가끔은 오고 가며 스치기는 했지만 어색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동안 마음 정리를 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사전예고도 없이 문득 찾아온 남자 친구가 의아했다.

무슨 일일까.

무슨 용무가 있어서?

잠시의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며 남자 친구가 말했다.

"오후에 선보러 가야하는데, 같이 가줄래?"


사실 남자 친구가 오늘 맞선 보게 될 친구는 나도 알고 있는 우리 대학교의 2년 후배이다.

그 녀의 할머니도 남자 친구의 할머니처럼 일본에서 사업을 하신다. 전해 듣기로는 두 집안의 할머님들께서 이미 오래전에 손주 손녀의 혼인을 약속하셨다고 한다. 소위 '정략결혼'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듣던 남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의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맞선 보는데 함께 가자는 남자 친구의 요청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알지만, 그리고 내가 응하지 않을 것임을 남자 친구도 모르는 바가 아닐 테지만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정말 가기 싫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약간의 고마움도 있었다.

하지만 응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후 우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의 소식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나는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북한은 한 진료실에 책상 하나를 놓고 두 명의 의사가 마주 앉아서 진료한다.

두 명의 의사에 한 명의 간호원( 한국에서는 간호사이지만 북한에서는 간호원이라고 브른다)이 배속되어 있다.

복도에서는 진료받으려고 오는 환자분들이 대기하고 있고 간호사가 차트(북한에서는 "병력서"라고 부른다"를 받아서 두 명의 의사에게 차례로 배정한다.


어느 날 진료실 문이 열리며 중년의 부인이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기 엄마는 아닐 듯한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전에 왔던 환자일까? 

간호원 선생님이 환자가 들고 들어오는 차트를 받아서 내 책상 앞에 놓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은 놀랐다.

아뿔싸. 남자 친구의 어머니다.

손녀를 안고 오신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란 정말 이런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을지 모르고 오셨을 듯하다.

나도 놀랐지만 나보다 더 놀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보다 훨씬 난감하고 민망했을 것 같다.

흔들리는 눈빛과 허둥거리는 행동거지에서 그 심정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

차트를 다시 들고 나가기에는 북한의 의료시스템에서는 쉽지 않다.

그냥 이대로 마주 앉기는 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분의 불편함을 헤아리고 싶었다.

슬며시 앞에 계신 선생님에게 차트를 밀어놓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료를 마치고 돌아나가셨을 때쯤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아까 그 환자분 아이가 어떻게 아팠나요?"

"네. 손녀가 소화불량이었어요. 아니, 지은 샘도 알지 않나요? 그 집 아들도 같은 대학 졸업생인데.."

"아 네...... 근데 왜 할머니가 데려오셨나요?"

"그러게요, 며느리가 집을 나갔나 봐.. 7개월 된 딸을 두고 친정으로 가버렸대요.. 결혼 후 남편이 계속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고 지금도 아이 아빠는 집에 없다네요."

" 아........"

유구무언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이 내 앞에서 드러나고 나에게 알려질 거라 생각했을 때 그 분 마음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억지로 강행한 결혼을 했던 아들은 이후에도 계속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함께 같은 의학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했지만 남자친구는 의사생활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늘 밖으로 나돌면서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견디기 힘들었던 의사 며느리는 7개월 된 딸을 시어머니에게 두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졸지에 나이든 시어머니는 7개월된 손녀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는 상황이 더 많겠지만 이렇듯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남기면서 상처를 주는 상황도 있다.


남자 친구의 부모님께 남은 건 뭘까.

손녀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3대독자의 맏이었던 당신 아들의 삶은?

그리고 아이 엄마인 며느리의 삶은?

늘 정답이 없는 문제인 듯 하다.


나도 아들을 둔,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안그럴거야 하지만 과연 나는 말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거짓말 같지만 거의 매일 매일 생각하고 읍조린다. ~참. ㅎㅎ


결국 우리 두 사람, 남자친구와 나는 각자의 삶에서 다시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되니 대학 동기들이 또다시 난리다.

운명이다. 

천생 연분이다 하면서.

하지만 소시적 사랑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은 정말 명언인것 같다.


어느날 건늠길에서 남자친구와 마주섰다. 정말 오래간 만이다.

서로의 근황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이다.

갑자기 남자친구가 아주 어릴때의 나를 부르듯이 손짓하며 소리쳤다.

"지은아,,지은아~~"

하지만  그는 그저 대학 동기일 뿐 내 마음속에서는 어떤 애틋한 감정도 일지 않았다.


순수했고, 열정적이고, 지키고 싶었던 사랑의 굵은 선은 이미 지워졌다.

희미한 실선만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가끔 추억속에 비치고 있었다.

그 굵은 선을 잊기 위하여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아픈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싶지 않다.



손녀를 안고 온 남자친구의 어머니를 진료실에서 마주 했을 때

나는 아팠던 마음을 위로 받았고 지난 시간을 모두 돌려 받았다고 생각되었다.


감사합니다. 



끝~~




추신:


이후 한국에 온 아들이 문득 나에게 물었다.

"선"에 대해 어떤 마음이냐고.

왜 묻느냐고 하니. 가끔 남자친구가 이모(나의 언니)에게 나에 대해 물어왔다고 한다.

한 시내에서 살다보니 가끔은 만나기도 했나 보다.

결국 우리 연애당시에는 태어나있지도 않았던 아들까지 알게 될 만큼 그 친구는 나에게 미련이 남았나 보다.

언제인가 언니도 통화 중 문득 물었다.

네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선'에게 얘기해줄까? 하고.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나도 살짝 관심이 생겼다.

지금 만나면?

괜찮을것 같았다.

그냥 한번 쯤은 볼 수 있었으면 어떤 감정일까..궁금하다.

함께 나이들어가고 공통으로 간직된 아름다운 추억으로 우리는 좋은 친구, 그 이상으로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배경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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