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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Jan 30. 2021

나는 베이징역의 "삐끼"였다


 삐끼 – 다음 국어사전            

음식점이나 유흥업소 따위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유의어-호객꾼)



지난편의 "체포"는 공안체포후 북경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으로 마쳤습니다.

전편을 읽고 이번편을 읽으시면 이해가 좀 더 쉬우실 듯 합니다.
궁금하신분은 요기에-체포

체포






공안에 잡혀있다가 나오는 걸음으로 베이징행 열차에 올랐다.  입던 옷가지도 챙기지 못한 채 열차에 오른 나는 흡사 난리통의 피난민 같았다.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몰골에 긴장과 공포로 허둥거리는 불안한 눈 빛, 마음먹고 관찰하면 이상함이 몸에 배어 있는 젊은 여자였다. 


달리는 열차의 통로를 끊임없이 오가며 여행객들의 행상을 살피는 공안경찰에 불안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몰골은 허접하더라도 얼굴에는 시종일관 밝은 웃음을 띄려고 무지 노력했다. 불안함과 애써 밝으려 하는 표정이 어우러졌으니 얼마나 어색했을까. 그래도 다행히 공안에 색출되지 않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 간간히 속삭이듯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태연함을 유지했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말을 한다는 것은 최소한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라는 인식으로부터는 멀어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설렘도 낭만도 없는 긴~~ 열차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베이징역에 도착했다. 북경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실 테지만 "전문(前門챈먼"이라고 부르는 베이징역 앞 광장은 상상 이상으로 넓을 뿐 아니라 사람이 정말 많다. 일행을 잊어버리면 아마 찾기 힘들거라 생각되는 정도이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그 넓은 베이징 땅 덩어리에 내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고 베이징시내의 동서남북 사면팔방 길은 틔어있지만 발걸음을 내디딜만한 목적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 동안일까. "멍~"하니 앉아 노숙자 생활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던 중 멀리에 보이는 낯익은 간판이 눈에 띈다. 진분홍빛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그려진 포스터와 함께 "진달래 식당"이라는 간판도 있다. 아.. 저기로 가보자. 적어도 말을 붙여볼 수는 있지 않을까. 주소는 모르지만 높이 서있던 간판을 쳐다 보면서 어리 짐작 찾아갔다.


멀리서 볼 때는 간판이 높아 큰 건물인 줄 알았으나 골목골목 진창길에 바짓가랑이 적시면서 찾아간 곳은 정말 어지럽고도 작은 식당이었다. 우리가 보통 기사식당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테이블 6개를 놓고 오며 가며 손님을 받는 곳이다. 식당 안이 더럽다기보다 식당 주변에 다른 식당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음식물쓰레기 냄새와 주변식당들로 인한 하수도가 막혀 오물이 쌓여있는 전형적인 "베이징후퉁(베이징골목)"이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무작정 들어섰더니 식당 사장인듯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자가 쳐다본다. 간판속의 여자다. 키도 크고 예뻤다. 구석진곳에 있기는 아까운 체격과 미모를 지녔다. 거지형색으로 나는 그 앞에 섰으나 자존심같은 건 이미 나의 인식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일하고 밥 먹여줄 수 있는 곳을 찾아왔다고 답했다. 최대한 거짓 없는 솔직함이 표현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어쩌면 비굴해 보였을 수도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아래 우를 흩어보던 여사장은 식당이 작아서  손님도 많지 않고 급여는 줄 수 없지만 밥 먹여주고 재워줄 수는 있다고 했다. 그렇게 그 여사장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좁은 방안에 둘이 누우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가 비슷해서였을까 꽤 잘 통했던걸로 기억된다.  남편이 돈 벌려고 한국에 갔고 자기는 북경에서 작은 식당으로 근근이 벌어 남편이 한국 가면서 진 빛을 값는다고 했다. 사실일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까짓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거짓말을 할 거니까.


나는 연변 시골에서 왔는데 한국 남자랑 결혼(당시 연변의 조선족 여성들은 한국 남자와의 결혼이 꿈이었고 진짜 결혼도 있었지만 한국으로 가기 위한 가짜 결혼도 성행하던 시기 었다.)하려고 고향에서 돈을 빌려가지고 왔는데 사기를 당해서 빚쟁이들 때문에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신분증도 잊어버려서 지금 이 꼴이라고 했다.


여사장도 내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월급 주지 않고 일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여사장과 월급은 없어도 밥먹여주고 재워줄 곳이 필요했던 나.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다른 이해관계하에 "동상이몽"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곳에 일하는 동안 나는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을 했으나 나름 눈치 보거나 꾀부리지 않고 약삭빠르고 성실하게 일했던 것 같다. 여사장도 그런 나를 신뢰하는 눈치였다. 아니 신뢰하고 있다고 나만 믿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나중의 상황들을 통해 유추해보면.


잘 기억나지 않지만 8일인가 10일인가 되었을 무렵, 자기 식당은 환경도 그렇고 자는 곳도 너무 좁으니 일자리 소개해 주면 좀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고마웠다. 역시 나를 좋게 봤구나 생각했다. 

그럴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답변했다.  내가 가게 되는 곳은 민박집인데 밥하고 빨래하는 일을 하게 된단다.


난감했다. 빨래는 그럭저럭 할 수 있지만 밥은 어렵다. 주방에서의 일은 의욕도 없고, 재간도 없고, 자신도 없다. 그랬더니 괜찮다고 설득당했고 이곳보다 집도 크고 화장실도 집에 있다고 했다. 사실 북경에 있을 때 늘 화장실이 신경 씌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아마 중국 어디를 가봐도 일반인들이 사는 곳의 화장실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가보신 분들은 아시지 않을까.


지금도 어떤 건물이든 화장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화장실도 좋다는 말에, 그리고 집도 크고 환경이 이곳보다 깔끔하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끌리기는 했으나 이 여사장이 나를 이곳에 계속 두기 힘든 상황이구나 하는 판단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소개해주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게 간 곳이 베이징의 한인촌 "왕징"이다. 얼마전에 어떤 글을 보니 북경의 전역에 한국인들이 13만 명 살고 있는데 그중 10만 명이 왕징에 산다고 한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전이어서 그정도는 아니었을테지만 어쨓든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곳인건 사실이었다. 고층건물이 즐비했고 정말 큰 도시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곳에 산다면 뽀대 날 것 같았다. 마음이 아직은 삭막하기는 했지만 작은 설레임도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민박집 면접을 봤다. 그곳에서도 여사장이 면접을 봤는데 당시 나는 주방일을 할 줄 모른다는 것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이렇게 시원하고 넓은 곳에서 살 수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긴장된 마음이었다. 음식을 할 줄을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아는 체 하는 것보다 일단 잘 못한다고 먼저 말하고  선택은 상대편이 하게 하는 것이 나의 관계 방식이다. 그래야 잘 못해도 뒤탈이 없고 나도 아는 체 했던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처세라고 할까.


여사장은 주방은 자기가 할 테니 장보고 야채 다듬고, 기타 빨래, 청소 같은 것을 하면 된다고 했다. 남자 사장님도 있었으나 거의 모든 중국 조선족 남성들은 모여서 마작하거나 그냥 와이프를 조금씩 거들면서 사장님 흉내만 내는 경우이다.


왕징의 민박집은 고층아파트 4층에 있었고 주로 숙박하는 손님들은 한국 남성들과 조선족 여성들이었다. 모르는 채로 소개받아서 이 집에서 만나기도 했고 이미 서로 다른 루트를 통하여 결혼을 약속하고 남성이 한국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오면 이 민박에 거처하면서 결혼하게 될 조선족 여성을 데리고 한국으로 갈 준비 및 절차를 받는다. 그 절차라는 것이 대사관에 드나들면서 결혼할 여성의 비자를 받는 것인데 그런 결혼에 진짜 결혼과 가짜 결혼이 있다는 것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진짜 결혼이든 가짜 결혼이든 여성은 한국으로 간다는 것에 들떠했고 남성들은 두 부류가 있었는데 진짜 혼인의 경우에는 결혼하다는 기쁨이 있었고 가짜 혼인인 경우에는 가짜 결혼등기로 여성의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데려다 놓으면 그 댓가(돈이다)를 받게 된다는 기쁨이 있다. 


어느 누구도 손해는 없었다. 굳이 손해로 따진다면 북경 속의 대한민국인  한국대사관은 속고 있는 것도 모르고 비자를 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법의 거래가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랬고 이런 생각을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밖이었고 가짜 결혼이면서도 남녀가 진짜 결혼한 부부처럼 행세하는 것에도 경악할 만큼 놀랐다.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왕징에는 민박집이 많다. 내 생각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인 것 같다. 민박집주인들끼리는 물론 손님들까지도 서로 어울려 노래방, 가라오케 같은 곳에 자주 갔다. 특히 한국에서 신랑이 오면 민박집 손님들에게 한턱 쏜다는 의미로 자주 나가서 밥을 먹든가 노래방 가든가 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노래방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놀고 싶을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어울리다 보면 서로 가까워지게 되고 가까워지다 보면 자신의 신상에 대해 조금씩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잘 따라다니지 않는다고 나를 지나친 새침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니들이 내 맘을 알아? 가 내 마음이다. 할 말도 없고 많이 감추어야 할 입장이었던 내게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맥주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놀러 다닐 만큼 의 여유도, 의지도 없었고 조건은 더욱더 힘들었다.


주인집 남자가 계속 같이 노래방 가자고 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매우 짜증 났다. 이곳에서의 상황이 내가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던 중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도 아침부터 노래방 간다고 난리들이다. 조선족 여성들은 결혼 약속한 한국의 남자와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한국 남자도 민박에 있는 손님들에게 돈을 쓰는 것을 은근 유세하고 싶어 하는 상황들이다.  내 입장에는 솔직히 "놀고들 있네, 까짓 노래방 비용정도나 지불하는 주제에" 하는 심정이었지만 밥벌이를 그곳에서 하는 상황에서 내가 어울리지 않으면 그만이지 비토 할 것 까지는 없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내 일만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날은 주인집 남자가 함께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려니 했지만 여성의 촉감이랄가 뭔가 오늘 내 신상의 일진이 좋지 않게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남자가 은근 슬쩍 수작질이다. 날도 더운데 밖에 나가 맥주 한잔 마시자고 한다.  술 마실 줄 모른다고 새침하게 퉁~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지, 급여 더 올려달라면 올려준다는 둥 그냥 들어도 속셈이 있어 보이는 말을 막 던지고 있다. 그런 문제는 필요하면 여사장님과 상의하겠다고 하면서 요령껏 맞받아 쳤지만 아슬아슬하게 상황을 모면해하는데 슬프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같이 나가지 않고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느냐. 당신 와이프한테 전화하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전화했다. 민박집 여사장에게 아니라 나를 이곳으로 소개해준 "진달래 식당" 여사장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이 집에 못 있겠으니 다른 곳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글쎄. 

"진달래 식당"주인이 이곳을 나한테 소개할 때 잘 아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이곳에 소개해준 댓가를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문득 들었다. 

어떡해야 하지? 

정말 어떡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정말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비가 필요했고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다. 


결국 민박집 여사장에서 전화했고  노래방 다녀오는 길에 밖에서 만났다. 상황을 설명했다. 무슨 일이 난 것이 아니어서 성추행, 성폭행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으나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보면 여자의 촉감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음을 이해한다. 여사장은 남편과 이야기할 것이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게 할 것이라고 나를 설득? 위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민박집 남자가 오늘은 함께 밖에 "빤썰(업무를 본다는 중국말") 가자고 했다.

깔끔하게 입으라고 했다. 깔끔해 봐야 입을 옷이 없었지만 그 말이 매우 거슬렀다. 바로 여사장인 와이프에게 물었다. 남자 사장님이 같이 나가자고 하는데 가도 되냐. 어디로 가느냐고.

 여사장은 같이 가도 된다고, 별일은 없을 거니까 안심하고 함께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게 남자 사장과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베이징역 앞 이었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그곳에는 많은 민박집주인들이 나와있었고 왕징의 내가 아는 다른 민박집 사장의 얼굴도 보였다.

뭣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남자 사장에게 누구냐고 묻는 것 같았다.

새로 온 민박 아줌마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박 사장님들이 와있는 이곳에 나는 왜 왔을까?

혹시 지난번에 일을 와이프한테 일러바쳤다고 나를 다른 민박에 보내려고 데려온 것 일가? 

그러면 다른 사장님 따라 가야 하는 걸까? 

가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텐데... 어떡하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뾰족한 해답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면서 모여 있던 민박집 사장들이 우르르 다른 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우리 민박의 남자사장은 나에게 그 사장님들을 따라가서 지금 기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우리 민박으로 안내해 

오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오늘 베이징역의 "삐끼"였다.

헉~~



~~다음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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