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로운 콩새 Jan 26. 2021

체 포





중국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없었다. 처음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나올 때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이렇게 드나드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잠깐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작했던 여정이 중국 땅에 눌러앉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삶은 날마다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이 신분 노출이었다고 생각된다.  북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경우 운이 나쁘면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골로 스며들었고 농사일을 비롯하여 마을에서 젊은이드이 없는 집안의 노인들을 돌보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땅덩어리가 끝없이 넓은 중국이라는 나라에 내 몸 하나 숨길 곳은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깊은 산골짝 농촌마을에 스며들어 살면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농촌이 오히려 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안 것은 중국에 자리 잡은 지 몇 개월이 지나서 공안에 잡혔을 때였다. 


보통 중국의 농촌들은 조선족만 사는 곳도 있고 한족과 조선족이 어울려 사는 곳도 있었다. 조선족 동포들은 탈북자들에 대하여 별로 신고하지 않는 다고 하는데 한족들은 가끔 신고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도 어느 해 봄에 잠을 자고 있던 중 새벽에 들이닥친 공안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새벽에 잠을 자는데 갑자기 출입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의 소음만으로도 벌써 상황이 예측되었고 뭔가 불길했다. 


보통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경찰은 나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내가 내민 신분증(물론 가짜 신분증이었다)은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공안으로 가자고 했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예감과 함께 문득 그 순간, 잡혀도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게 잡혀가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은 왜서일까? 지금도 내가 왜 멋있어 보이고 싶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경찰에게 세수도 하고 싶고 양치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주하지 않을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의 표정에 간절함이나 단호함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래 봤자 잡혀가는 주제에 하는 공안의 알량한 선심이었을까.  경찰은 순순히 응했고 나는 경찰들이 보는 앞에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가볍게 화장하고 나름의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손목에 수갑을 찼다.   

   

차디찬 수갑을 손목에 찰 만큼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그것이 이렇게 자다가 새벽에 가늘고 연약한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차고 끌려가야 하는 죄인가? 

서글펐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도 못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북한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도망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춥고 배고파서 목숨 걸고 살길을 찾아온 중국 땅이었다.


공안에 도착해서도 인간 이하의 대우는 마찬가지였다. 휑뎅그렁한 시멘트 바닥에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고 나를 그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라디에이터에 수갑을 걸어채웠다. 손이 라디지에타에 묶여 있어서 의자에서 일어나도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어서 몹시 허리가 아팠고 다리도 뻐근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경찰이 따라다니는 등 엄중한 죄인 다루듯 하는 것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휑한 공간에 있으니 갑자기 공포가 몰려왔다. 당시는 북한과 중국 모두 탈북자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북한은 직접 중국으로 들어와서 공안에 체포된 탈북자들을 인도해 나갔다.   

   

흉흉한 소문들도 많았다. 여러 명이 모이면 서로서로 손바닥에 철사를 꾀어 함께 끌고 간다고 한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도망치려고 몸을 움직이면 나머지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지르게 되어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고 감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살고 있을 때도 그런 애기를 여러 번 들었었고 나도 지금은 혼자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섞이면 그렇게 북한으로 끌려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해 보였다. 


이제 겨우 북한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의 작고 소박한 체험을 시작하려던 참인데, 이렇게 끝내기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없는 분노와 허무함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아직까지 내 편이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의 보증으로 공안에서 풀여나게 된 것이었다.

 중국의 농촌마을에는 “치보”라는 직책이 있다. 평범한 주민이기는 하지만 평상시에 마을 사람들에게서 신망도 있고 조직력도 있는 사람이 선출된다.  
    

“치보”가 하는 일은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잘 해결이 되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바로 내가 있던 마을의 치보가 공안에 찾아와서 사정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한 번만 풀어달라. 이번에 풀려나면 우리 마을에서 추방하겠다. 절대로 마을에 이상한 사람이 발을 붙이지 않겠다”라고 공안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공안에서 평범한 “치보”의 말을 믿고 어떻게 풀어줄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 치보가 상당히 신뢰받고 있었던 사람임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암튼 나는 풀려나게 되었다.

     

치보가 나한테 물었다. 이제 더는 우리 마을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다른 곳으로 가라. 갈 곳은 있느냐. 그동안 조용한 시골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표적이 더 크게 보인다는 것에 교훈을 얻은 나는 북경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북경과 같은 사람이 북적대는 큰 도시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안전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특히 북경은 외지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는 얘기도 간간히 들었던 터라 북경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풀려나는 날 경찰서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치보”는 나에게 북경 가는 기차표 한 장과 중국돈(인민폐) 30원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숨 막히게 어려운 상황들 가운데서도 운 좋게도 많은 은인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서 위험을 벗어나군 했다.



목단강에서 기차를 타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드디어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북경역 앞 광장에 서있게 되었다.

중국의 땅 덩어리가 크다는 생각은 했지만 북경역에 내렸을 때의 휑한 느낌과 삭막 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마 내 마음의 허전함 때문이었을 듯하다.  

북경역 광장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인듯 인파가 북적였고 주변의 고층건물들은 전혀 상상해보지 못했던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이 작은 몸뚱아리 하나 던져놓을 곳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이넓은 땅덩어리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정말 막막했다.

~~계 속~~

이전 04화 80년대 대학생, 나는 처음 남조선을 알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