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3년을 살면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중국에서 몇 년을 체류하는 과정을 통하여 나는 그동안 알던 남조선과는 전혀 다른 대한민국을 알게 되었고 북한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이 점점 더 짙어갔다.
2000년 초 중국에서 알게 대한민국은 북한에서 인식하고 있던 나의 예상을 확~~ 뒤집어 놓았다. tv를 통하여 보이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황홀함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서울시내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건물들은 물론 뉴스에서 보이는 사람들도 자유가 없는 곳, 핍박과 억압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활기롭고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은 나에게 남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욕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남한의 도서들을 읽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전혀 접해 볼 수 없었던 남쪽 도서들을 중국에서는 비교적 마음대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한하고 더 가깝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남한 문화가 들어와 있을 가하는 의아함도 있었지만 책을 좋아했던 나는 읽을거리가 있다는 것에 우선은 만족했다.
당시 중국 연변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남한의 서적은 소설들이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내가 접했던 남한 소설이라면 재일본 총련에서 발간되는 “시대”라는 잡지의 뒷부분에 연재되는 군부독재를 반대하여 싸우는 투쟁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전부였다. 그런 소설들을 어쩌다 읽으면서 남한이 독재정부 때문에 살기 힘들구나, 많은 사람들이 억눌려 있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남한과 관련 책 책들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내 손에 닿는 대로 읽었다. 닭 기르기, 트럭 수리에 관한 책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책도 재밌냐고 묻는 주인집 이모님의 의아함도 있었지만 우선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고 그것이 남한 책이라는 것에 만족했고 장르와 상관없이 남한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책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그때는 그런 책도 참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달에는 한 달에 50여 편을 읽을 때도 있었다.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공안이 두려워 밖으로 함부로 다니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던 나의 유일한 낙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소설책이 가장 많았는데 중국에서 접하는 남한의 소설들은 멜로, 추리, 추격, 휴먼 등 다양한 장르들이었다.
제목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중국에서 읽었던 남한 소설 중에는 한 부잣집 소녀가 가난한 집안의 남자 친구를 사랑하면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까지 골인하는 내용을 소재로 한 소설이 있었는데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떻게 남조선처럼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잣집 아가씨가 돈보다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의 소설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소설은 현실이 아니지만 문학은 작품을 통하여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이 출판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현실 속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것은 남조선 사회는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사회,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나의 머릿속에 전혀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나는 오랫동안 북경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남한에 대한 좀 더 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연변 쪽 시골마을에 있을 때 내가 접했던 남한의 문화는 단순히 티브이나 소설을 통하여 보이는 모습, 한국에 돈 벌러 들락거리는 조선족 동포들을 통하여 얻어듣는 일반적인 소식들이었다. 북경의 한국문화원이라는 곳에서 본격적인, 좀 더 구체화되고 세분화된 남한의 문화를 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중국 북경에는 한국문화원이라는 곳이 있다. 처음 한국문화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을 때는 대사관 직원들이 드나드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보통 외국 주재 문화원이라는 곳이 대사관을 통하여 자기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습관 등 많은 것을 알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 해당 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 한국문화원을 갈 때 사실 많이 떨렸다. 당시 나는 위조된 중국 주민증을 가지고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중국 조선족 신분이었다. 언어나 억양도 중국 조선족과 같기 때문에 깊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출입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공개하기는 더욱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들키지 않는 한 끝까지 속이기로 결심하였다.
첫날. 중국 조선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북경주재 한국 문화원에 들어선 나는 솔직히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한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직원에게 물어봤다. 다행히 직원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으며 한국영화를 시청하는 방법에서부터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을 알아가고 또 문화원에 비치되어있는 서적들과 신문들을 볼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메일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고 나중에 모 신문사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소개해 달라고 했었다. 물론 무작정 이런 메일을 보냈던 건 아니었고 당시 그 기자가 탈북자 관련 기사를 썼었고 기사 말미에 메일 주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자와는 그 후 한, 두 번 메일을 주고받았고 한국에 들어와서 만나기도 했었다.
한국문화원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신동아, 월간조선 등 잡지들이 한국과 같은 시간에 배달되고 있었다. 중앙의 지시와 내용을 전체 맥락이 흐트러짐 없이 복사한 듯이 하는 일방적인 보도에만 익숙되어있던 나는 여러 신문사의 사설들이 같은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던 것에도 굉장히 놀랐고 의아했다. ‘한겨레’라는 신문만 없었는데 한겨레는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서 정착교육받을 때 처음 접했고 내용은 다 모르지만 신문 이름의 느낌이 참 좋다고 생각되었다.
한국문화원을 다니면서 놀랐던 것 중의 다른 하나는 신문이 매일 해당 날자에 배달된다는 것이다. 외국인데 어떻게 이렇게 날자를 맞춰 올 수 있지? 중국 현지에서 신문을 찍어내나? 이렇게 많은 신문을? 그러면 매 신문사가 다 중국에 하나씩은 있나? 하는 생각을 할 만큼 나는 참 순진했던 것 같다.
당시 나의 관심은 한국영화(물론 영화에서도 굉장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나 드라마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에 있었다. 영화는 이미 지난 것을 가져오기 때문에 문화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는 쉬울 수 있으나 정보적인 가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신문은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의 현 실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신문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8시 30분경 한국문화원 직원들과 함께 출근하여 문화원에 들어서면 점심시간도 아까워 점심을 건너뛰는 것이 보통이었고 저녁에는 문화원 직원들이 퇴근할 때까지 남아있다가 아쉬움에 문화원을 떠난다.
베이징 주재 한국문화원으로 다니던 때 나는 거의 매일이다 시피 문화원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부터 문 앞에서 기다렸고 퇴근 때는 내가 보던 신문이나 잡지들을 놓기 아쉬워하다 보니 문화원 직원들이 잠깐 더 기다려 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나를 좀 이상하게 생각하였는지도 몰랐다. 당시 그곳에 근무하시던 분들 중 누군가는 꽤나 이상했던 나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
아침 일찍 와서 저녁 늦게까지 그것도 영화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신문과 월간지들만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 몇 개월간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일을 해서 먹고사는 걱정이 아니라면 그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내가 매일매일 신문을 보면서 느꼈던 생각은 남한이 생각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때로는 단순한 자유를 넘어 자유분방하다는 걸었다. 북한에서 일율적으로 지정해서 내려보내는 것만 받들고 믿는것에 세뇌되고 습관되었던 나는 신문에 소개되는 글의 내용이나 흐름이 하나로 일관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정돈되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소신껏 자기 생각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권력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과 국민들의 여론을 반영한 단호한 경직 등은 모든 것이 통제되는 북한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들이었다.
북한에는 가장 유명한 신문이 일간지인 “노동신문”이고 이마저도 아무나 볼 수 있는 신문이 아니라 당비서를 비롯한 특정된 몇 명만 보는 신문이다. 물론 각 도별로 함경 일보, 함남 일보 하는 일간지가 있고 초등학교 대상 소년신문이나 고등학교,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민주청년 같은 신문들도 있기는 하지만 노동신문만 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특정된 사람들에게만 배정되다 보니 신문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늘 아쉬움이 가득했다.
내가 근무하던 청진시 구역병원에는 직원이 150명 정도 되는데 노동신문은 딱 1부가 당비서용으로 배달된다. 매일 새벽 일찍이 배달되는 신문을 보기 위하여 나는 매일 아침 일찍이 출근해서 초급당비서실 청소를 자진해서 했으며 얼른 청소를 마치고 책상 위의 신문을 읽군 했다.
신문을 읽으면서 그날 당비서가 꼭 봐야 할 사설 같은 것이 있으면 스크랩해서 당비서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아침 조회시간에 당비서는 내가 추려놓은 사설을 가지고 당에서 전달되는 내용이라고 직원들에게 내리 전달하군 한다. 신문을 계속 읽게 해 달라는 나의 아첨이기도 했다.
이후 신문을 읽고 스크랩하고 하던 이과정이 내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렇게 신문에 목말라 있던 나에게 베이징 주재 한국문화원에서의 신문구독은 별천지였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되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아마도 2001년 여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법무부 장관이 새롭게 선출되었다. 그런데 장관 임명장 받고 48시간이 되기 전에 경질되었다. 경질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문서가 유출되었는데 그 에 대한 책임문제였다.
48시간이면 사실 업무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러 언론의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신임 법무부 장관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결국은 장관에 임명된 지 2일만(언론에서 48시간 장관이라고 보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에 자리를 내놓게 되었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짧은 장관 경력을 가진 인물로 낙인찍힌다.
신문에 소개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남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나라라는 인식에 혼란이 생겼다. 장관이라면 나라의 큰 인물이고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한은 막강할 건데 국민여론은 물론 언론에 의해서 해임될 수도 있다는 것은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의 틀속에서 오래 동안 복종하는 것에만 습관 되어왔던 나에게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언론이 이 참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월간조선”이나 “신동아”같은 잡지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북한의 실상의 구체적인 이야기들 뿐 아니라 남한의 여러 가지 상황들, 얼핏 생각해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정보적 가치가 있는 내용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한 글들을 읽으면서 남조선이라는 나라는 비밀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올 때는 거짓말하고 있네, 자기들이 북한을 얼마나 알아서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점차 빨려 들어가면서 북한을 진심으로 냉정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에 올려보지 못했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만큼 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그저 무료로 교육받고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으면 그것이 자유를 마음대로 누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적어도 내가 공부하던 시기 정도까지는 북한이 그러했다.)
하지만 한국문화원에서 접할 수 있었던 한국의 모습은 나에게 진정한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하였고 자유란 어떤 것이고 나는 지난 기간 얼마만큼 자유를 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성찰을 해볼 수 있게 했다. 물론 자유를 위하여 내가 지켜야 할 의무나 법적 규제도 있을 것임도 생각하게 되었다. 자유만 생각했다면 아마 남한으로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국문화원에서의 정보는 나에게 한국에 대한 환상만 심어준 것은 아니었다. 나의 판단으로는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모습들도 충분히 있었다. 지나친 자유스러움이 때로는 무질서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임명된 지 이틀 만에 해임되는 장관의 모습을 보면서 “언론이 무례하다” 든가 “사회가 무례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규정된 틀속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는 인식으로만 살아왔던 관념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법무부 장관이라는 높은 권력을 지난 사람이 하루아침에 낙마하는 공포스러운 모습이 단지 자유나 민주적이기 때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법무부 장관은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를 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에 대한 책임 때문에 낙마한 것일 수도 있으니 나는 내가 준수해야 할 의무를 잘 지킨다면 나한테 주어진 권리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법무부 장관까지 낙마시킬 수 있는 현실이 다소 공포감이 들기는 했지만 평범한 사람인 내가 개인으로서 나한테 부여된 평범한 권리만 요구하고 권리주장에 대항하는 의무만 잘 지킨다면 내가 사는 것은 큰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의 뇌리에 더욱더 강한 자극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이 자기의 생각을 북한보다는 아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대한민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한국행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