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북한을 떠날 때 나는 이렇게 한국까지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단지 북한 사회를 벗어난 다른 사회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1990년대 후반의 북한 사회는 10여 년 동안의 경제적 혼란으로 기아와 고통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사회질서는 무너졌으며 사람들은 여기저기 방황하는 그야말로 체계적인 지난 시절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 나의 뇌리에 가장 큰 궁금중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중국으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그 방법은 각각이었다. 몇 달씩 중국에 들어가서 식당 같은 곳에서 일을 해서 식구들 먹을거리를 구입할 만한 돈을 벌어오는 사람. 북한에서의 골동품 같은 것을 들여가 비싼 값으로 한국의 거간군들에게 팔아 한순간의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 심지어는 피를 팔려고 들어가는 사람이나 중국 남자들과 결혼하고 결혼지참금으로 받은 돈을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어 가족을 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선택하던지 북한을 떠나서 국경을 넘었다는 자체는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는 엄밀히 배신이었고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또한 불법체류였다.
두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중국에서의 탈북자 색출이 빈번해졌을 뿐 아니라 그 방법도 아주 가혹했고 처참했다. 붙잡힌 사람들을 철사로 꿰어서 끌고 다니기도 하였고 북한 주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성토모임 같은 것도 진행했다. 물론 몇 달간의 강제노동이나 교도소 생활도 했다.
조국을 배반하는 그런 행위는 손톱눈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나는 붙잡혀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때로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갈수록 이상한 부분은 그들이 중국에서 처참하게 잡혀와서 노동 단련 소에 갔다가 출소하면 또다시 중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3~4번씩 되풀이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봤다.
그들을 보면서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생각은 고생스럽게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 왜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 일가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과연 어떤 곳이길래, 거기에 무엇이 있길래 저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복하고 있는 것 일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가보고 싶었다. 당시 나의 상황도 별로 윤택하지는 않았다. 한국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의사생활 10여 년 정도였으면 탈북할 정도로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고 의아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북한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말씀이다.
북한은 한국과 다르다. 한국은 개인 소유가 허용되는 사회지만 북한은 철저히 집단 체제에 의하여 모든 것이 국유화된 사회이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의사든, 대학교 수던, 당일 군이든, 군인가족이든 모두 국가에서 월급을 주고 배급을 받는다. 국가 경제가 어려우면 월급이나 배급을 받을 수 없고 그러면 생활이 어려운 것은 노동자나 의사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좀 다르다면 일하는 환경이나 받는 월급이 다른 것이다.
그렇게 나는 탈북을 결심했고 결국 삶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하는 수단으로 조중 국경을 넘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3월 말의 두만강은 아직도 차고 냉랭했다. 깎아지른 벼랑 밑으로 흐르는 북한 쪽은 얼어있었지만 밋밋한 야산과 맞닿아 있는 중국 쪽은 녹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무작정 중국 쪽을 향하여 걸음을 내디뎠다.
고요한 국경은 신발이 얼음 위에 살짝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도 얼음이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처럼 뇌리를 파고들었고 마음을 옥죄였으며면 심리적인 큰 불안감으로 엄습해왔다. 강 절반은 지나왔지 않았을까 하는 안도감을 가지려는 순간에 “야, 거기 서~~”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작정 뛰었다.
다행히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당시 나의 심정은 총을 쏘면 그냥 맞고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총 맞고 순간에 죽은 다면 굶어서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는 더 나을 수 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예상하던 대로 중국 쪽은 2~3미터 정도 강물이 녹아있어서 발이 빠지면서 몸 무계가 한쪽으로 쏠렸다. 키가 작았던 나의 허리 위로 물이 차올랐고 뼛속까지 시린 느낌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를 실감했던 순간이었다.
살을 에이는 냉기도 순간이었고 보다 힘들었던 것은 둥둥 떠내리는 얼음덩어리들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두 배의 힘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2~3미터의 거리였지만 거의 15미터 정도 아래쪽으로 밀려내려가면서 강을 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만강을 넘었다. 어쩔 수 없어서, 더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무작적 내디딘 걸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다. 어디로 가지? 저 멀리 바라보이는 논밭 가운데 농가 몇 가 보였지만 딱히 어느 집으로 들어가야 할지 몰랐다. 당시 여름 신발에 홑옷을 걸치고 있었던 나는 강물에서 나오자마자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있었다.
옷에서 흐르던 물은 금방 얼음이 되어 온 몸을 뒤덮었고 바지는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얼어서 굳어져 있었다. 간신히 마을에 이르렀으나 어느 집도 문을 두드리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굶고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까지도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가.
마을길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데 중년의 어머니 한분이 지나가다 나의 아래위를 쭉~ 훑어보시더니 말을 건넸다. “조선에서 왔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입으로 직접 확인해달라는 어조로 들렸다.
연변 쪽의 사람들은 북한을 조선이라고 부른다.. 입술이 얼어붙어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나는 주제가 너무 초라해 보인다는 것에 더 신경을 쓰면서 겨우 대답했다. “예” 재차 물으신다. “누구네 집에 왔소?” 어떤 답변이 나올지를 미리 알고나 있었던 듯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재차 물으셨다. “어디 갈 곳이 있소?”
그때 생각했다. 어디로 가지? 내가 지금 어디로 가려고 이러고 있는 거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비로소 설음이 확 치솟아 올랐다.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을 넘었는데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갈 건지도 모른 채, 어디론가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순간 눈에 눈물이 고여 올랐고 다정하게 묻는 할머니에게 살려주세요..라는 애절한 구원의 눈빛을 보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갈 곳이 없어요. 아무 곳도 갈 곳이 없어요.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자신의 댁으로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나는 그렇게 중국 연변의 한 시골 농가에 며칠을 묵을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가 덥혀주시는 목욕물로 목욕을 하고 할머니가 입으시던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아랫목에 누우니 어느덧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면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 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할머니께서 아침 겸, 점심 겸 식사를 차려 놓으셨다.
하얀 쌀밥과 묵은지 돼지 고깃국에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아삭아삭한 김치, 순간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이 삼켜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의 눈과 코와 혀를 자극했던 것은 삶은 달걀이었다.
나는 지금 몇 년 만에 달걀을 보고 있다. 워낙 달걀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달걀을 먹어 본 지 너무 오래전이라 그 맛이나 촉감까지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너무 먹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두 알밖에 먹지 못했다. 아니 두 알만 먹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달걀을 포함하여 차려주신 음식을 다 먹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오랫동안 굶어왔던 나는 지금 이 순간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으면 분명 속에서 탈이 생길 거라 생각되었다. 그러면 초면에 신세 지고 있는 것도 미안한데 화장실 들락거리면서 민망한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먹고 싶다는 강열한 유혹과 먹으면 안 돼. 그만하고 참아야 해..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하는 이성과의 싸움이 그 짧은 순간 너무나도 강하게 일어났었던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깊이 기억이 남았다.
이렇게 며칠 그 할머니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집에 머무르더라도 남의 집은 눈치 보이기 마련이다. 며칠을 있다 보니 눈치 주지 않아도 자연히 위축되어 최소한 밥값이라도 하려고, 밥상에 마주 앉을 때 미안하고 민망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싶어 무슨 도움되는 일을 할 것 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보니 밖에 언 밥덩이와 고깃덩이가 있었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맨날 햇밥을 해주시고 먹다 남은 음식을 밖에 내놓으셨다고 생각한 나는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 저기 밖에 있는 밥을 덮여서 먹어요.”
“무슨 밥?”
“저기 밖에 내놓은 그릇에 놓여있는 얼어있는 밥과 고기요”
힐끔 하고 그곳을 쳐다보신 할머니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셨다.
“응... 그건 사람이 먹은 것 아녀..”
“?? 그럼 누가 먹어요?”
분명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데.. 왜 안 먹는다고 할까.. 그리고 왜 밖에 저렇게 내놓고 있을까?
내가 의아해하자 할머니께서 설명을 해주셨다.
“저 밥은 개가 먹으라고 내놓은 것이야.. 그런데 개가 느끼해서 그런지 안 먹네....”
“..............”
순간, 멍~~ 했다.
개가 먹다니.. 개밥이라니, 개밥이라니
내가 봐도 충분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개를 주다니.. 그런데 개도 안 먹는단다... 먹기 싫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북한에서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하는 것이 김일성의 소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살았다. 그래도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점점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삶이 힘들고 기와와 빈궁 속에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풀죽 한 그릇이 없어 나는 소아과 의사로서 영양실조로 맥없이 목숨줄을 놓아버리는 아이들을 수없이 봤다. 나도 수없이 굶었고 우리 엄마도, 우리 아빠도, 우리 이웃들 모두가 굶기를 밥 먹듯 하다 견디지 못해 이곳까지 왔는데.. 아, 이밥에 고기, 저 고급 음식을 개도 안 먹는다니~
잠깐 생각했다. 개도 안 먹는 저 이밥과 고깃덩어리를 북한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까?
당일 군?
군인가족?
그렇다면 당일 군이나 군인가족도 1년 365일을 저렇게 먹을 수 있을 가..
먹다가 못 먹어서 저렇게 버릴 수준이 되었던가?
답이 없었다.
“개보다도 못하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이던가.
이게 뭔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세상에 부럼 없는 나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내가 사는 내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동안 내가 받았던 교육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한꺼번에 뇌리를 스쳐 지났다.
사실 나는 북한을 떠날 때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떠났다. 잠깐 중국에 와서 상황을 살펴보고 먹고살 수 있는 식량 같은 것을 조금 얻어가지고 도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 순간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동안 내가 숭배하고 따랐던 내 나라,
내가 배웠던 교육, 내가 꿈꾸고 있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북한 바깥에 있었다.
뭔가를 다시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시는 이것이 즉흥적인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당시의 충격은 너무도 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