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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Jan 22. 2021

80년대 대학생, 나는 처음 남조선을 알았다


내가  텔레비전을 통하여 처음 남조선 상황을 보게 된 건 1980년 5월이었다.  물론 그 전 해인 1979년 10월 27일 아침의 분위기도 잊을 수 없다.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에서는 굳은 표정의 아나운서가 박정희씨(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의 시해에 대하여 격앙된 목소리로 보도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긴장과 함께 또한 설렘과 기대 같은 것도 느껴졌다.

학교에 온 학생들도 들뜨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좀 어렸던 우리는 남북한이 당장 통일되는 줄로 생각되어 흥분한 채 수업준비도 하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각자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박정희가 죽었는데 왜 통일이 안되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진심으로 의아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났고 이듬해 봄 1980년 5월에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처음으로 남한을 보고 있었다. 

당시는 학생이었고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5월 17일 저녁뉴스에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급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5월의 광주 10일간을 공포와 경악 속에서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 


이후 남한 민주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던 86년, 87년 여름을 대학생 신분으로 남조선 대학생들과 마음을 함께 했다. 이 무더운 폭염에 저 뜨거운 아스팔트 길에 어깨 겯고 누워있는 대학생들과 직장인(회사원을 부르는 북한 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남조선 사람들의 삶이 빨리 안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응원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최루탄과 뽀얀 화약연기, 피 터지는 아우성 위에 휘둘리는 곤봉, 이 모든 것이 빨리 사라져야 할 텐데, 빨리 통일이 되어서 저들도 우리처럼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텐데” 하는 것이 당시 내 머릿속 생각이었다.


20대의 젊은 촉이 발동한 것일까. 그런 속에서도 머릿속에 번뜩이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데모하는 대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모습이 상당히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같은 옷을 입은 학생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항상 같은 색상, 같은 디자인의 단체복만 입는 모습에 익숙해있던 나에게 그 많은 대학생들이 모두 다른 색상, 다른 디자인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 굉장히 자유로운 모습으로 비쳤다. 게다가 손목에 시계를 찬 학생들도 의외로 많았다. 당시 북한에서는 대학생들 속에서 손목시계가 일종의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때다. 남한은 북한보다 못 사는 줄 알았는데. 많은 대학생들이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이었고 이런 남조선이 진짜로 어떤 사회일까 하는 느낌이 들면서 굉장한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의아함은 대학생만이 아닌, 노동자들의 모습에서도 느껴졌다. 살기 힘들다, 월급을 올려달라, 노동현장의 작업조건을 개선해달라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북한 노동자들의 얼굴보다 기름기가 돌고 혈색이 좋고 아주 건강해 보였다는 점도 역시 이해 안 되는 부분이었다.

어? 

이럴 수가? 

뭘까?

의문이 생겼지만 당시 나의 사고로서는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생각을 진척시킬 수가 없었고 깊이 생각해보려는 심리 그 자체만으로도 당 앞에, 국가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북한의 상황 속에서는 오래된 세뇌교육으로 인하여 이러한 생각들의 폭을 넓혀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교육에서는 언제나 북한이 최고였고 우리보다 더 좋은 삶의 형태를 가진 그 어떤 나라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교육에 세뇌되어있었던 나의 머릿속은 이미 그 이상의 사고를 넓혀나갈 수 없을 만큼 좁혀져 있었고 또 거기에 멈춰져 있었고 거기에 굳어져 있었다. 더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더 깊이 생각해 보려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죄의식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애써 무시해버렸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식과 눈앞에서 보이는 모습들 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간격은 20대 초반 북한 대학생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남한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되었던 계기는 1989년 제13차 평양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왔던 당시 21살의 임수경 씨의 모습에서였다.  짧고 경쾌한 단발머리에 몸을 날렵하게 할 것 같은 “나이키”운동화(물론 그때는 그 운동화의 브랜드명도 몰랐지만 이후 북한에서는 나이키라는 이름이 불리게 되었다)  발목 쪽으로 폭이 좁아지는 푸른색 청바지에 깔끔하게 받쳐 입은 흰 티셔츠는 당돌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남조선 여대생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당시의 그녀는 놀랄 만큼 당당했고 자유롭고 발랄한 모습이었다. 남조선에서 온 같은 또래의 여대생의 이렇게 톡톡 튀는 모습은 답답하고 무겁고 틀에 갇힌 조직생활에 익숙되어있던 북조선 여대생의 눈과 마음을 황홀하게 자극하고도 남았다. 


남한이라는 사회가 무겁고 침침하고 삭막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고 편안해 보일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은 몇 해 동안 조금씩 싹터왔던 남한사회에 대한 궁금증에 큰 구멍을 남기면서 의문에 의문을 더해 갔고 자연스럽게 남한이라는 사회에 대한 작은 호기심의 불씨를 마음속에 던지기에 충분했다.


자유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남조선에서 온 여대생, 13차 세계 청년학생축전의 개막식장에서 한치의 긴장도 없이 당당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몇십만 명 군중들의 환호에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여유로움은 자유가 없는 곳에서 온 남조선 대학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북조선에 왔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보여주려는 모습이 아닌, 그 순수한 자유로움은 몸에 밴 것으로 느껴졌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임수경 씨에 대한 일화들도 많았다. 당시 그녀는 평양의 여러 대학들을 찾아 북한 대학생들과의 만남을 가졌던 걸로 알고 있다. 김일성 종합대학인가 김책공대인가 남학생들이 많은 대학에서의 일이다. 임수경 씨는 이야기 도중 한 남학생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단다.


지명받은 남학생이 많은 학생들과 책상 사이를 빙 돌아서 나오자 임수경 씨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무슨 남자가 그렇게 쪼물짝하게(목표나 규모 따위가 크지 못하고 보잘것없다-북한어) 행동하냐고, 책상을 훌쩍 넘어오라고 하면서 자신이 직접 뛰어넘는 시범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북한의 남학생들은 손뼉치고 웃으며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일화들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이건 자유로운 걸까. 아니면 방자한 걸까 잠시 헷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행동의 예의 여부를 따지려는 건 아니다. 당시 그녀의 말과 행동들은 나뿐만 아니라 북한 대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당당하고 당돌해 보였고, 꾸밈없고 자유로워 보였던 건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임수경 씨로 하여 남한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했던 임수경 씨는 1989년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 판문점에서 북한 대학생들과 며칠간 단식도 했다. 이 단식에는 당시 나의 남자 친구도 함께했었다. 당시 우리는 판문점을 통과해서 남한으로 가려는 임수경 씨의 의사를 남한에서 받아들이지 않아서(판문점 통과에 대한 불허) 단식을 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 오니 당초 7월 27일 전승의 날에 내려오려고 했었는데 북한에서 만류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거짓말이기는 하겠지만,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암튼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고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한 임수경 씨는 곧바로 안기부로 연행되었다. 판문점의 녹음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아니 잊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남한으로 가면 곧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으로 생각되어 안타깝고, 안쓰럽고, 걱정되는 마음에 오래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북한에서 내가 들었던 소식은 임수경 씨가 남조선에서 3년형을 받았고 감옥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족과 상봉하고 오빠의 자녀인 조카의 이름을 “하나”라고 지어주기도 했다는 등 육체적 자유가 조금 구속되었다는 것뿐이지 우리가 상상하던, 처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우리 관점에서는 매우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정말 충격이었고 놀라웠다. 북한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국가를 배신하고 국경을 넘어갔고 온갖 선전을 하고 온 사람을 겨우 3년 감옥생활로 마무리짓는다는 것에 우리가 교육받았던 그런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달랐다. 뭔가 달랐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다가 아니었다. 내가 상상하던 무서움과 폭력과는 굉장한 거리가 있다고 느꼈던 남조선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끔 친지들에게 내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에는 임수경 씨의 역할도 있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사실이기도 하다.   


  


 


이후 1991년 가을부터 시작된 식량난에 이어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생각의 폭은 중단되었고 남조선은 더 이상 나의 관심이 아니었다. 병원생활이 바빴고 나름대로 열의를 가지고 본업에 충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한번 남조선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달리 가졌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1993년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남조선에서 비전향 장기수로 40여 년을 수감 생활하고 있었던 이인모 씨의 판문점 북송 모습의 실황중계를 보면서이다.  몇십 년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살아온 이인모 씨가 그 몇십 년 동안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왔다는 것은 북한에 대한 충성심의 발현이고, 이런 영웅을 당연히 북한으로 모셔와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국가적인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1993년 3월이었다고 기억된다. 이인모 씨의 북한으로의 송환 과정을 티브이를 통하여 시청하면서 더욱더 나의 가슴을 뛰게 했던 장면은 감옥에서 나온 이인모 씨를 2년 8개월간(당시 티브이에서 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돌봐주었던 한 중년 부부의 모습이었다.


이인모 씨는 남한에 일 점 혈육이 없는 혈혈단신이다. 연세도 많으신 그분을 친자식처럼 돌봐주셨다는 중년 부부가 북한 티브이에 방영되었다. 나의 인식 속의 남조선은 황금만능의 사회였고 돈이 없으면 제대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없는 사회였다. 연세도 많고, 돈 한 푼도 없을 노인을, 그것도 정치성향이 달라서 몇십 년간을 감옥생활을 하다 나온 사람을 자식이 부모  모시듯이 돌봐주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돌봐드린 것은 물론 뇌수술도 시켜드렸다는 것이었다. 가볍게 생각해봐도 뇌수술은 가벼운 수술이 아니어서 수술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을 텐데. 자비로 수술비를 대면서 수술을 시켜 드리다니. 게다가 그걸 갚을 능력도 안 되는 사람에게. 사실일까. 정말 남조선이 그렇게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일까. 이해되지 않았다. 


이인모 씨가 북송될 때 판문점까지 배웅을 나왔던 중년부부의 푸근하고 인간적인 모습, 부모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으로 배웅하는 모습 속에서는 가식적인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진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남조선에도 인간성이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남조선에 대한 인식은 나의 머릿속에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너무너무 궁금하지만 더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묘하고 모순되는 마음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북한 사회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나 자신도 살아내야 했고, 내가 맡은 환자들도 살려내야 하는 피 말리는 생존경쟁에 휘말려 들어가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넓혀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들로 하여 나의 마음속에는 무서운 남조선으로부터 내가 좀 더 알아야 할 부분이 아주 많은 남조선으로 점차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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