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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Jan 02. 2021

내가 만난 첫 남조선 사람, 최 씨 아저씨

북한에 있을 때는 남한을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북한에서는 그저 남조선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받아왔던 교육은 남조선은 미국의 의존국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모든 것이 미국에 예속되어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우리에게 통용되었던 이름은 남조선이었다.


남조선에는 다리 밑에는 정말로 판자촌이 즐비하고 거지 떼들로 널려있는 줄 알았다. 2004년도 가을쯤 한 신문사 기자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동시대에 남한과 북한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녔던 같은 연배의 우리는 남북한에 대하여 각자 너무나도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슬프다는 생각을 했었다.


기자가 생각하고 있던 북한은 빨간 뿔이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남한에 거지가 많고 아이들을 유괴해서 외국에 팔아버린다는 내용의 웅변을 한 것에 대해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서로에 대한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내가 중국에서 보게 되었던 연변 조선족들의 남한행을 위한 꿈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북한을 떠나 중국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중국에는 한국에서 사업차, 또는 여행으로 다니러 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동포들도 돈 벌기 위해 빛을 내서 한국으로 나가는 붐이 불고 있었다. 중국에 나와서야 내가 북한에서 알고 있던 남조선이 단순히 사람 못살 곳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은 내가 알고 있던 이상으로 경제적인 강대국이 되어있었고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여 지는 고층건물이 즐비한 도시들과 오고 가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하여 볼 수 있었던 일상생활의 모습에서 북한보다는 훨씬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면서도 묘하게 자존심이 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내가 사는 내 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 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남조선은 어쩐지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잘 사는 나라인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한 남조선 신사(최 씨 아저씨라고 했다)가 만남을 요청하였다. 혹 지금 상상하고 있는 그런 이상한(?) 만남의 의미는 물론 아니다. 당시 내가 있던 곳은 연변의 작은 시골마을이었고 나는 어떤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금방 소문이 나게 되었다. 북한에서 온 여의사(당시까지만 해도 작은 시골마을에서 생각하는 여의사는 꽤나 느낌이 있었나 보다)가 어느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분이 한번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인편에 연락을 보내왔다.


당시 신분을 숨기고 있어야 할 상황이기도 했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아왔던 나로서는 생면부지의 어떤 남성이, 그것도 남조선 사람이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 뜻밖이었고 선뜻 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자기가 뭔데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마음을 더 무겁게 한 것은 내가 왜 남조선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건가는 것이었다. 북한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조국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남조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국을 두 번 배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게다가 북한을 떠나서 알게 된 남조선 현실, 북한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고 중국사람들이 이토록 꿈의 나라로 받들고 있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당시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 대하여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웅을 떠받들듯이 하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북한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그렇게 떠받들리고 있는 줄로 알았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하여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쳐들면서 칭찬하고 우러러 따르고 있다고 교육받았던 터라 남조선 사람들이 이렇게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심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내가 처한 환경은 어떤가. 북한에서 아무나 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닌 의학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배고파서 허겁지겁 쫓기듯 북한을 떠났고 판자촌에 거지 떼가 우글거릴 줄 알았던 남조선에서 온 사람이 이토록 대접받는 현실에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더욱 만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이건 내가 당신을 만나주지 않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위로를 하면서 말이다.


그런다고 현실은 어디 가겠는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자존심 상하는 것이 속상해도 북한은 사람들이 기아와 궁핍 속에 죽어가고 있고 남조선 사람은 외국에 나와서 우대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의 이런 속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그 남한 신사는 인내를 가지고 끈기 있게, 그러면서도 불편하지 않게 만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해 왔다. 


나도 내심 만나고 싶은 속내가 없지는 않았었다. 남조선 사람은 어떨 가. 교육받았던 대로 강한 이미지에 무서운 느낌 일가. 내가 북한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살다가 나왔다고 무시하지는 않을 가. 만나는 동안 자존심 상해서 괜히 만났다고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 가. 별별 생각을 하면서 쉽게 답변을 하지 못했지만 사실 정말 만나보고 싶었다는 것이 진심이었다.


부끄럽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백할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텔레비전을 통하여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접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는 모르지만, 각자가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북쪽 사람들이 필요 없이 자존심을 내세운다는 느낌은 누구나 한 번씩 가졌봤을 것이다. 당시 나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조선 남자와의 기싸움에서 절대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은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속담을 되뇌면서 말이다. 


그래서 만나는 주겠지만 요구조건이 있다고 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여서 당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관계로 만난다는 느낌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암튼 만남의 조건으로 내가 내들었던 첫 번째 요구사항은 북한 정권에 대한 말은 하지 않는다. 둘째로는 한마디라도 자존심 상하는 대화일 때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등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낯 뜨겁고 부끄럽고 민망하고 송구하기 그지없다. 가끔 그때의 생각을 하면 혼자 있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등골에 식은땀이 촉촉이 맺히군 한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그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중간에서 중재하던 사람이 전해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전해주지 않았기를 지금도 바란다.




 그렇게 마련된 만남이었다. 서로 마주 했을 때의 첫 대화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뙤약볓이 걷잡을 수 없이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더워서도 땀이 났지만 약속된 집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긴장되어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는 속에서도 비 오듯 땀을 흘렸던 것 같다. 

어떤 집에서 만났었는데.. 내가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었고 조금 뒤에 그 남조선 신사분께서 자기 애인과 함께 들어왔었다. 반가운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리는 보통 조금은 정리안 된,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 속에서 나를 대하는 상대의 마음이 얼마나 급하고 반가워하는 지를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날의 만남이 그랬다. 그 남조선 신사, 최 씨 아저씨의 등장이 그랬다. 


시골집은 보통 토방에 올라오면서 신발을 벗게 되어있고 신발 벗으면서 문을 열면 바로 방안과 연결되는 구조이다. 신발을 급히 벗는 듯한 소음이 밖에서 들렸고 곧바로 방문이 열리면서 보통의 아저씨와 다름없는 모습의 남자가 방안으로 성큼 올라선다. 


긴장해서 쳐다보는 나를 향해 매우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 와~ 오늘 진짜 덥네요. 그죠.”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상대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제스처와 표정에 놀라고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뭔가 근엄하고 팽팽하면서도 긴장한 순간을 예상했었는데 완전히 빛나갔다.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도 따라서 한마디 했다. “그렇죠? 너무 더워요..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 긴장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가뭇 사라지고 나는 오래전에 동네에서 같이 자랐던 동네 오빠를 만난 듯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이 떠오를 때마다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편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 것이 ‘동포애의 정’이라는 것이 아닐까..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같은 피가 흐르는 우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쉽게 마음이 열리고 스스럼없었던 것이었으리라. 신발을 벗으면서 툭 던진 최 씨 아저씨의 한마디, 어제 만났던 고향 동생을 오늘 다시 만나는 기분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에 몇십 년 얼어있던 나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던 것이리라.






그분께 감사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내 남조선 사람들이 이렇구나. 그냥 우리와 다름이 없네. 무섭지도 않고, 나를 무시하지도 않고. 그냥 동네 오빠 같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네 모습과 똑같구나.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거처 있던 집 이모가 나를 백화점에 데리고 나가서 옷 한 벌을 사주셨다. 내 생각에는 주인집 형편으로는 살 수 없는 꽤나 비싼 옷이었고 게다가 나에게 그런 비싼 옷을 사줄 이유가 없었었기 때문에 좀 의아했다. 하지만 이런 옷을 입어야 공안경찰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모의 설교에 마지못해 주는 대로 입었다. 옷이 날개라고 이쁘고 세련되게 입었더니 내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마음가짐이나 행동가짐도 매우 자연스러워졌으며 나는 그렇게 연변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훗날 내가 그 집을 떠날 때 집주인이 나에게 고백했다. 사실 예전에 백화점에서 사준 비싼 오는 ‘남조선 신사’가 사준 옷이라고 했다. 당시 최 씨 아저씨는 직접 나에게 돈을 주면 내가 자존심 상해할까 봐 주선했던 이모님께 돈을 주면서 좋은 옷 한 벌 사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세심한 배려에 또 한 번 놀라웠고 고마웠다. 




이 사람이 남조선 사람이다. 우리가 그토록 증오했고 미워했고 무서워했고 상종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남조선 사람인 것이다. 최 씨 아저씨와의 짧은 만남을 통하여 나는 점차 남조선을 알아가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 머릿속의 지난 교육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남한의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최 씨 아저씨. 그 후 전혀 소식을 모르고 있지만 그 인자한 모습이 남한 전체의 모습이길 바라고 그런 모습들이 나를 통하여, 또는 새터민들을 통하여 북한에 보이고 느껴지게 하여 남북한 대화와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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