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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초연 Sep 29. 2015

# 1. 손가락 끝에 맺힌 감동

- 병동 에세이-

서늘한 바람에 절로 옷깃이 여미어지는 오후, 어느 한 병실에 오롯이 누워있는 한 여자환자분의 보호자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8병동의 긴 복도를 지나는 내내 내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실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뜨거운 느낌은 없었다. 이전까지는 체온과 비슷한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근 듯 물의 느낌조차 알 수 없는 공허한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한겨울 밤 꽁꽁 언 손을 따뜻한 물에 천천히 집어넣은 듯한 찌릿함과 묘한 행복감이라 할 수 있겠다. 


목요일 어느 오후_


이것 좀 보라는 외침에 달려간 그 곳에는 L-tube(비위관 삽입/코를 통해 영양분 공급)를 꽂고 허공에 둘 곳 없는 시선을 둔 예순의 여자 환자분이 누워 있었다. 거리를 좁히며 다가간 그곳에는 가습기가 뿜어대는 뿌연 김 속에서 날 부른 따님과 닮은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짧게 다듬어진 반삭의 머리에, 새파란 실핏줄이 비치는 왜소한 손등에는 차가운 수액을 실은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


뒤척거릴 미동도 힘겨운 그 분에게서 나는 소리라곤 그마저도 일정치 않은 들숨과 날숨의 오고가는 소리뿐이었고, 곱게 낀 쌍꺼풀만이 젊은 날의 화사한 날을 기억하는 듯 초점 없는 눈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선 마음은 빗방울 맺힌 거미줄을 연상케 했다. 손대면 방울들이 깨져버릴까, 거미줄이 끊기진 않을까하는 조심스러움이다.


이윽고_ 따님이 가리킨 손끝에 어느 움직임이 맺혔다. 주사바늘이 꽂혀있지 않은, 온기로 그윽한 오른쪽 손을 두어 번 까딱거리는_ 짧고 작은 움직임이지만 손끝에 앉은 날벌레가 놀라 달아날만한 움직임이었다. 

숨소리만이 지배하던 고요하던 공간은 손끝에서 일어난 미세한 그것으로서 이내 보호자의 감탄스러운 음성으로,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에겐 커다란 경종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순간적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슬로우 모션으로 무한 반복될 최고의 장면. 보호자인 따님은 그 움직임에 눈물을 흘리며 날 불렀던 것이다. 기뻐하는 딸의 모습과 하얀 가운을 입고 함께 좋아하는 이름 모를 날 응시하시던 예순의  어머니. 그녀의 까만 눈이 이 글을 쓰는 내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병원에서 생겨나는 소음에 가만히 귀 기울여본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소음의 중심에는 갇힌 몸에서 깨어난 환자의 감탄스러운 음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앞으로의 시간동안 그녀의 까만 눈 속에서 파랑 같은 삶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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