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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Oct 21. 2022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두 시간

-다시 요가 수련을 시작하며



짙은 암갈색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 들어온다. 전날 설정해 놓은 알람이 울리기를 벌써 몇 번째 일까.

게슴츠레 눈을 떠 팔을 최대한 길게 뻗는다.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여섯 시 오십 분. 벌써 도착해야 했을 시간이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미처 깨어나지 못한 뇌를 굴려본다. '5분 안에 준비해서 간다 해도 도착하면 8시. 수련실은 9시 20분쯤 넘으면 닫으니까...' 따뜻한 온수 매트에 누워 있어서 일까. 눈꺼풀이 절로 감긴다. '밤 11시에 자려고 누워서 새벽 한 시에 일어났으니 2시간, 죽 못 자다가 새벽 5시에야 잠이 들었으니 2시간 더하기 한 시간 반은 세 시간 반...' 낮에 일하러 가서 사람 구실 하려면 적어도 네 시간은 더 자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잠 못 자고 운동하면 몸에도 안 좋으니까...' 그렇게 오늘의 요가 수련과도 안녕을 고한다.


콘서타(ADHD 치료제)를 먹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3개월이 지났다. 항우울제와 함께 집어 입안에 털어 넣고 약효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약이 몸 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몸이 '일으켜진다.' 고픈 배를 쥐고서도 밥을 차리지 못했던 몸뚱이가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간다. 여전히 밥 차리기는 귀찮지만 뭐라도 주워 먹기 위해 찬장이며 냉장고를 뒤진다. 오늘 일정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씻으러 들어가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효가 들기 전 두 시간, 그리고 약효가 든 직후 1분 이내다. 


문제는 약을 집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합치면 2시간 1분이 훌쩍 넘는다는 거다. 아침은 늘 그렇듯 멍하고, 침대는 어김없이 유혹적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을 거부할 이가 누가 있을까. 하지만 주의집중 조절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난 나에게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에 손가락 하나 뻗는 일은 거북이가 달리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힘겹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저 멀리 발끝 자락 어디메쯤 있는 의욕을 끌어올려 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아령을 매단 듯 무겁다. 구르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고는 샤워를 하기 위한 에너지를 비축한다. 모로 누웠다가 바닥을 굴렀다가 일어나 무릎을 감싸 안고 한참을 멍 때리며 샤워를 견뎌낼 힘을 모은다. 나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기능하기 위해, 그리고 최소한의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매일 아침 의식을 치르듯 행할 뿐이다.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을 차리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요리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긴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 느리지만 어떻게든 해낸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약효가 나타난 걸 알기란 쉬운 일이다.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을 씻을 힘을 비축하는 시간-나는 설거지도 좋아하지 않는다.-이 평소의 두배로 짧아지면 감이 온다. '이제 약 먹은 지 두 시간쯤 지났겠구나.'







이런 나도 부지런할 때가 있었다. 한창 요가에 빠져 있던 시절, 매일 아침 최소 6시에는 일어나 10분 안에 씻고 옷 갈아입고 입을 헹군 후 문밖을 나섰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가량 나에게 주어진 진도만큼 수련하고 나면 어느새 아침 해가 밝은 거리를 걸으며 양기를 듬뿍 섭취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조차도 일찍 일어나는 데는 소질이 없어서 내내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후 요가를 하러 가곤 했다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제력과 인내심이 내겐 없었다. 널 뛰는 감정 기복에 조그만 일에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고, 오밤 중에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잘 시간을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였다. 마구 달려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 짓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요가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황 때문이었다. 20대에 몇 차례 공황 발작을 겪었다. 약을 받아먹고 상태가 금세 호전되었지만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나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두 번 다시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인지행동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그걸 위해 돈을 더 벌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인지행동치료의 대안으로 호흡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는 행위를 선택했다.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 많이 그러하듯 나는 요가를 택했다. 



가끔은 돈이 떨어져서, 때로는 취업을 해서 요가를 쉬었다. 여러 가지 수를 두고 하루 일과를 조직하는 일이 버거울 때 제일 포기하기 쉬운 게 요가였다. 그리고 요가를 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불안감이 찾아왔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혼자 있는 밤에 잠을 못 이루며 다른 사람의 의견이 없으면 결정을 못 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나는 뿌리 없는 나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았다. 



'나'로 살아가는 만족감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호흡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고 있노라면 뿌리 깊은 자기 불신도 진실이 아니라 그저 익숙한 사고 회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려운 자세를 수도 없이 시도하며 성공을 맛보고, 때로는 잘 만들던 자세가 나오지 않아 속상해하며 상황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마음을 보는 법을 익혔다. 요가는, 요가를 하는 '나'는 어떤 얘기든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친구였다. 



매일 아침 항우울제와 ADHD 치료제를 입 안에 털어 넣어도 마음의 중심이 서지 않아 흔들리는 걸 바로 잡을 순 없었다. 여러 정신 건강 전문가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약과 함께 인지행동치료, 정신 치료를 함께 하는 게 가장 좋다고. 


뼛속 깊이 스며든 무력감에 무거운 한숨만 푹푹 내쉬기를 한 달, 그 한 달 동안 나는 다시 요가를 시작하기 위한 힘을 조금씩 비축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옷 갈아입고 날씨가 어떻든 상관없이 집 밖을 나서는 생활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매일마다 물었다. 대답은 '노'.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때는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루 정도 고민한 끝에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도파민처럼 나를 일으켜주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존재인 나의 요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요가를 다시 하고 싶어요."

"하고 싶으면 그냥 와서 하면 되지."

"아니요 선생님.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필요한 것 같아요."


수화기 너머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나는 요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번개같이 씻고 가방을 챙겨 문 밖으로 나서는 생활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계속 흔들리는 채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요가가 필요했다. 필요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집 밖을 나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선생님은 그걸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불렀다. 



선생님께 전화까지 해가며 다시 수련하겠다고 해놓곤, 일주일도 채 안되어 나가겠다고 한 요일마다 다 빼먹었다. 들쑥날쑥하는 수면 패턴을 조절하지 못한 탓이었다. 


'최소한의 노력'까지 가는 길에 조금의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어려운 아사나(요가 동작) 하나를 만들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는 것처럼 '최소한의 노력'에 다다르기 위해 글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고자 했다. 약이 두 시간 동안 서서히 몸을 깨워 움직이는 걸 도와주듯 글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연말쯤 들춰볼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덤으로 얻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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