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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Dec 29. 2022

ADHD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생활의 균형을 잡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한동안 ADHD약을 먹지 않았다. 약 없이도 충분히 하루하루가 알차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오늘, 다시 약을 먹기로 다짐했다. 이유는 생활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즐겁게 흘러가는 마당에 대체 약이 왜 필요하냐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낮과 밤이 바뀌었다. 

사실 평생을 앓아온 증상이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올빼미 형 인간이었다. 밤만 되면 뇌가 각성이 되는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구 결과를 보니 이것도 ADHD 증상 중 하나라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ADHD환자의 75%는 낮과 밤의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 등 수면과 관련된 생리학적 신호가 정상인보다 1.5시간 늦게 나타난다고 한다. 


전문가에게 물어 정확하게 얻어 낸 결과는 아니지만, 콘서타를 복용할 때 희한하게도 낮과 밤의 균형이 잡히는 걸 느꼈다. 콘서타 자체가 각성 효과가 있기 때문에 너무 늦게 복용하면 수면에 방해가 되지만 일찍 복용하면 오히려 밤에 깔끔하게 잠자리 들 수 있더라는 거다. 최근 일주일 조금 넘게 약을 먹지 않으면서 밤에 뇌가 각성이 되어 점차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늦어졌고, 어제 일찍 잠자리에 누웠음에도 뜬 눈으로 그야말로 '밤을 새웠다.' 


이처럼 밤을 새우게 된 경위에는 멜라토닌 분비가 늦어서도 있겠지만 머릿속에 온갖 즐거운 생각이 가득해서 이기도 하다. ADHD의 특징 중 하나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적당히 끊지 못하고 계속 그 일에 몰두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하기 싫은 일은 남들보다 더 못 견디지만 하고 싶은 일에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리는 게 ADHD환자의 특징이라고 한다. 


나 역시 이런 특성이 있다. 한 가지에 꽂히면 주변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이 흐리게 보이고, 어떤 때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학창 시절에는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 간의 성적 편차가 엄청났다. 스무 살을 넘어서도 이 증상은 계속되어서, 좋아하는 과목은 A+을 받는 반면 그렇지 않은 과목은 아예 수업에 나가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중간이란 게 없었다. 미친 듯이 하거나 아예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최근 번역에 푹 빠졌다. 우연히 저작권이 만료된 글들을 모아두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라는 사이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후로 틈 날 때마다 들락거리며 흥미로운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100년 전 글들 중에 지금 읽어도 반짝이는 보석 같은 글을 찾을 때마다 유레카가 절로 나왔다. 열아홉 살 즈음에는 게임에 빠져서 며칠 동안 씻지도 자지도 않고 게임만 하곤 했었다. 그때 느꼈던 재미가 우스울 정도로 옛날 글들 중에 숨겨진 보석을 찾아내는 일이 즐거웠다. 말하자면 이 일이 나에게는 일종의 게임이었다. 곧 이 재미있는 글을 좀 더 자세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텍스트를 가장 철저하게 읽는 방법 중 하나인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곧 미친 듯 빠져들었고,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눈이 뻑뻑해서 더 이상 할 수 없겠다 싶은 때가 오면 아쉬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닫곤 했다. 분명히, 나에게 번역은 즐거운 게임이었다. 


뭔가 하나에 빠지기 시작하자 주변 일에 소홀해졌다. 적절한 수면과 운동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의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 더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번역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싶었다. 덕분에 뇌가 각성이 되어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어느덧 겨우 잡아 놨던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루하루 새로운 열정 덕분에 즐거운 건 좋았지만 꾸준히 다니기로 한 요가를 빼먹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양심에도 찔리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렸고,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하루종일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즐겁게 느껴지는 현상이 분명히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이 문제를 깨달은 건 순전히 반려인 덕분이다. 스스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오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밤을 새우고 요가를 가야지'했다가 남편으로부터 한 바탕 잔소리를 들었다. 잠을 자지 않고 운동을 하면 건강을 크게 망친다는 거였다. 그동안 요가를 너무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에 건강을 망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하려고 했던 거다. 그 말에 수긍하고 자리에 눕자 옆에서 재잘재잘 요즘의 내 상황을 분석해주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현재 지나치게 즐거움만 추구한 나머지 생활의 균형을 잃은 상태였다. 가만히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즐거움만 쫓느라 다른 건 모두 손에서 놓아버린 셈이었다. ADHD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뭐든 천천히 꾸준히 하는 게 중요했다. 이렇게 잠도 못 자고 시력도 나빠져 가며 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시 콘서타를 먹기로 결심했다. 즐거운 일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기 위해서다. 몸 건강을 챙기고 내 관심사 밖일지라도 꼭 필요한 다른 일들을 하기 위해서다.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생겼을 때 푹 빠져들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하지만 뭐든 그러하듯 적당히 할 필요가 있다. 나는 태생적으로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약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부터 다시 약을 먹기로 했다.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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