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르른도로시 Jan 27. 2023

ADHD인과 정리정돈

-나는 더 이상 설거지를 미루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종합심리검사를 통해 '주의력 결핍의 양상이 현저하여 주의력에 대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상태'

라는 소견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꽤 최근까지 주의력 결핍 때문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내 탓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청소'다. 


 나는 어릴 적부터 청소나 정리정돈에 잼병이었다. 우선은 그게 왜 필요한지 몰랐고, 두 번째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아마 두 번째 이유가 주의력 결핍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은 어김없이 폭탄 그 자체였다. 며칠을 쌓아둔 설거지, 벌써 이주가 넘도록 닦지 않은 바닥, 허물처럼 벗어던지는 바람에 산더미처럼 쌓인 옷가지까지...


 나는 집안이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별로 더럽지 않은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거 아냐? 하는 말도 자주 내뱉었다. 신랑이 정리하려고 노력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면 늘 같은 레퍼토리를 읊었다. 


 결국 신랑이 반쯤 농담조로 '내 팔자려니'하면서 집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서 보니 집안이 달라져있었다. 여전히 약간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집안 꼴은 갖춘 모양새였다. 쾌적했다. 그제야 나도 잘 정돈된 환경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동안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가며 정리정돈을 거부했던 걸까.


 




 어떤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특히 억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내 힘이 약해서 따지지 못했던 종류의 일은 쉽게 떨쳐내기가 힘들다. 


 여섯 살 때, 유치원 수련회였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이 제각기 세수를 하고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꽤 능숙하게 할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나는 담임 선생님의 꾸중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넌 대체 왜 다른 애들처럼 빠릿빠릿하질 못하니? 다른 애들 봐라. 얼마나 알아서 척척 하냐고." 졸음에 겨워 겨우 뜬 두 속으로 선생님의 짜증 가득한 얼굴이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스물네다섯쯤 되었을 그 선생님은 고된 업무 환경에 시달리느라 나 같이 손 많이 가는 아이를 참아 줄 마음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던 내가 그런 사정까지야 알 턱이 없었을뿐더러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집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나는 늘 늦게 일어나는 데다 제 단속을 제대로 못하는 아이였다. 엄마는 앞집, 윗집, 옆집 온갖 애들과 비교하며 자기 자식은 왜 이렇게 늦되는지 한탄하셨다. 


 마음속으로는 부모님이 정리해 놓은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집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내 방 하나 제대로 정리할 줄을 몰랐다. 청소보다는 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정리를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어떻게 구획을 짜야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게 정리 정돈이란 마구 얽혀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전선 같았다. 흠을 알아보는 눈이 발달되지 않았을뿐더러 요령도 없었고, 요령을 짜 낼만한 열정도 없었다. 거기에 더해 스스로 '나는 원래 정리 정돈을 못하는 아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히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정리 정돈의 '정'자만 들어도 버럭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 이 모양인 걸 어쩌란 말이야!'




 저하 10개, 경계 3개가 뜬 CAT(해피마인드 종합주의력 검사) 검사 결과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약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가 눈앞에 있으니 이제 받아들이고 수정해 나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의 에고는 강했다. 지난날, 나는 내 단점을 지적받을 때마다 방어기제를 발동시켰다. 그 방패의 이름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나는 원래 남들보다 더러운 걸 잘 인식 못하고, 나는 원래 정리 정돈을 잘 못해. 그러니 그만 포기하시지?' 하며 팔짱을 낀 채 상대방의 조언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 결과 신랑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내 팔자려니'하는 말까지 꺼내게 된 것이다. 자는 동안 집안은 몰라보게 말끔해져서 생활하기에 편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개운했다. 부끄러웠다. 어렸을 때야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자기 방어기제를 펼쳤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어른이다. 자기 한 몸 정도는 엄연히 책임질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두 손 두 발 다 놓고 배우자만 고생시키는 형편이었다. 



 당장 설거지부터 미루지 않기로 했다. 밥을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정돈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간 그렇게 해보니 생각 외로 기분이 좋았다. 이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다 큰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그간 미루고 미루던 세탁소 가기, 미용실 가기 등 잡다한 업무도 처리했다. 귀찮기만 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일들이었다. 


 정리 정돈을 잘하는 방법도 배우기로 했다. 우선 신랑이 정리해 놓은 걸 뇌 속에 스캔했다. 구역을 나눠서 종류별로 깔끔하게 물건을 놓아두는 법을 익혔다. 그간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2% 부족한 정성이 깔끔함과 깔끔하지 못함을 나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른으로 사는 일은 지루하다. 어릴 적 환상과는 달리 재미있는 일은 너무 빨리 끝나고(밤새도록 술 마시기, 불타는 연애 즐기기 등),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은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주의력이 심하게 결핍된 사람에게는 이 모든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 자체가 남들보다 더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뭐든 그렇듯이 마음 가짐을 달리하고 조금씩 개선해나가다 보면 답은 있다. 


게다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꽤 근사하다.  

작가의 이전글 ADHD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