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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Feb 26. 2023

내가 생각하는 출산율 저하의 진짜 이유


 매년 출산율 추이가 공개될 때마다 나라 전체가 들썩인다.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이 소멸될 거라는 얘기에서부터 세대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읽고 보고 듣노라면 앞으로도 계속 출산율이 곤두박질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기서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할 일은 아니니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제쳐두고라도, 이미 2030의 뇌 속에서 출산과 육아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된 지 한참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출산 기피에 관해 여러 말들이 많다. 일신의 편함만 추구해서 그렇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비롯해 일자리 문제라는 꽤 타당한 진단도 있다. 실제로 유일하게 출산율이 1.0명을 넘는 세종시를 보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전문가도, 국가정책 연구원도 아닌 평범한 내가 그런 측면까지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2017년에 나온 '가임기 여성 지도'에 따르면 '가임기 여성'으로 분류되는 내 입장에서, 그리고 1990년대에 태어나 현재까지 쭉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청년의 입장에서 본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2017년을 화끈하게 달궜던 문제의 가임기 여성지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충만했던 기억의 부재'



 여성 지인들 혹은 친구들과 함께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노라면 "애를 주눅 들지 않고 남들 누리는 것만큼 다 누리게 살도록 하려면 이 정도 수입은 있어야 돼." 혹은 "그 정도 지원도 해주지 못할 바엔 차라리 안 낳는 게 애한테 죄짓지 않는 길이야."와 같이 아이 키우는 데 드는 비용에 관한 이야기가 수시로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것이 비단 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비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이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사랑하는 내 아이가 부모인 나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혹자는 말한다. 원래 세상살이란 불공평하다고.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순 없다고 그게 현실이라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각자 다른 삶의 조건 때문에 차별받거나 모멸감을 느끼는 게 정상은 아니다. 앞서 대화를 나눈 친구들은 각자의 삶에서 그런 경험들을 갖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폭력 앞에서 무력한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슬픔과 분노는 다른 데로 새는 일 없이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여 있다가 비혼과 비출산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라는 독립된 주체로서 충만했던 기억, 존중받았던 기억이 부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미래에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불행해할 아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그들의 삶의 책임지기 위해 세상에 내보내지 않는 거라고 말이다. 


 재력의 차이에 따른 모멸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정말로 그 눈에 띄는 '차이'때문에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끊임없이 남들과의 경쟁과 비교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에 있다. 남들만큼 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도태될 것 같고, 한 번 뒤쳐지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 거라는 불안감에 있다. 




사진: Unsplash의Egor Myznik




 우리의 성장기가 충분히 행복했다면, 성적과 부모님의 재력과 상관없이 마음껏 꿈을 꿀 수 있고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될 인적자원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알아가는 재미를 알아가는 공부를 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자신만의 삶의 철학이 단단히 다져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남들만큼 못 키울 바엔 차라리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식이 힘들고 빡빡하게 살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거다. 그렇게 살도록 종용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실은 자식이 최고의 삶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 강요하는 것일 테다.  

내 자식이 앞으로 행복하리란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마음 놓고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장 이 사회에서 성장했던 내가 행복하지 않았는데 무얼 믿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단 말인가. 대체 무슨 권리로?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으라는 말,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국가 공동체를 위기로 내모는 일이라는 비난이 통할 만한 시절은 일찍이 지났다. 그보다는 현실이 원래 이러니 어쩔 수 없다는 말, 남들도 다 견디는 데 너만 왜 그러냐는 말 등 불행을 당연시하는 문화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다. 생긴 꼴 대로 살아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 충만한 그런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성적에 따라 등급화되는 것이 당연한 성장기를 보냈던, 국가로부터 철저히 '자원'으로써 취급되고 교육받았던 우리 세대의 가슴속에 나로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 기뻤던 기억은 없다시피 하다. 우리의 친구들은 친구라는 이름의 경쟁자였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포로였다. 불 보듯 뻔한 그 삶 속으로 자식을 집어넣기에는 너무나 책임감이 투철한 것이 지금의 젊은 세대다. 우리는 책임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행복을 도외시하는 삶을 살게 된 걸까. 인간은 성장기 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동물이다. 지나친 비교와 경쟁 없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가 된다면 젊은이들도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각자도생을 진리로 삼는 사회에 천사 같은 아이를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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