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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Feb 22. 2023

헤매도 괜찮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현재 영어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다. 

한때 잠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일을 그만두고 주로 학생 관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통역사(?)겸 가르치는 일도 짬짬이 하는 보조교사로 일하는 중이다. 그나마도 전업은 아니고 파트타임이다. 맏딸을 어디 내놓아도 부족함 없는 사회인으로 기르기 위해 평생을 애써오신 부모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복장 터지는 일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내려놓으셨는지 크게 별말씀은 안 하신다는 점이 우리의 관계 유지를 위해 참 다행일 따름이다.


  사실 나는 영어를 전공하지 않았다. 방송대 영문학과를 다니고 있으니 영어를 전공하는 중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이 성골로 쳐주는 코스-영어 관련 학과(적어도 인서울) 졸업, 영미권 학교 유학, 어학연수 등-를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 


  나는 미술을 전공했다. 한마디로 영어와는 전혀 관계없는 학과를 나왔다는 말이다. 전공을 선택할 당시에는 그림 그려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열정이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열정이 있으면 미술로 밥 먹고 살 수 있기는 하다. 집안이 받쳐주는 사람들에 비해 두 세배 혹은 열 배로 힘들기는 해도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열정의 용적은 그만큼 깊지가 않았는지, 한 달에 드는 캔버스 값과 물감 값만큼의 열정이 쭉쭉 빠져나갔다. 대책 없이 사그라드는 열정을 어떻게든 붙잡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찬물이 끼얹어진 불씨를 다시 살려내기란 무진장 어려웠다. 


  대한민국 평범한 서민 형편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부모님께 죄송스러웠고 내 끈기는 이것밖에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자신감까지 바닥을 치는 바람에 재기는 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인정하는 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랬다. 나는 애써 고생해 가면서까지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왕이면 편한 걸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때문에 고생길이 불 보듯 뻔한 일을 굳이 하려고 뛰어들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보따리 장사를 하러 방방곡곡을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림은 그리면 그릴 수록 짐이 늘었다. 간혹 그림을 사겠다는 분들이 계셨지만 대체로 말 뿐이었다. 아직 가능성이 확인되지 않은 젊은 작가의 그림을 무엇을 믿고 사겠는가. 나 조차도 믿지 못하는 나를 누가 믿고 배팅한단 말인가. 자유롭기 위해 시작한 예술이 점점 무거운 등짐처럼 느껴졌다. 


 결국 포기했다. 때문에 한동안 깊은 우울에 시달렸다. 세상이 원하는 인재가 되지 못할 바에 삶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부모님을 실망시켰고 스스로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실패했다는 날카로운 감각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나는 별안간 방송대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요가 때문이었다. 아쉬탕가 요가를 시작하고 나서 보니 발리 등 해외에서 요가를 하는 요기니들이 멋져 보였다. 몸에 딱 달라붙는 요가복을 입은 근육질의 그녀들은 해외 등지에서 영어로 요가 수업을 듣거나 혹은 요가 수업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자유롭게 여행하는 요기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나를 영어의 길로 이끌었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얼마 후 코로나가 불어 닥쳤다. 좁은 원룸 안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열심히 하진 못했다. 우울증 때문이었다. 코로나가 닥치면서 그나마 하던 알바자리까지 궁해진 데다 나름대로 정신을 붙들어 주었던 요가원까지 문을 닫은 탓이었을까. 무기력과 우울은 점점 더 곰팡이처럼 마음속 창고를 좀 먹었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매 학기 18학점을 신청하고도 3학점밖에 따지 못할지언정 끝까지 자퇴 신청을 하는 일은 없었다. 비록 매니저 일이지만 영어와 관련된 일인 영어 학원 일자리를 구했고, 말 한마디 내뱉으려면 머릿속에 주행 금지 수준의 짙은 안개가 낄지언정 꾸준히 영어 회화 스터디에 발도장을 찍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편입을 했음에도 내 앞에는 여전히 18학점을 꽉 채워 3학기를 더 다녀야 졸업할 수 있는 험난한(?) 길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한 발짝 큰 도약을 이루었다. 당장 유튜브만 뒤져봐도 수두룩하게 나오는 영어 고수들에 비하면 허접쓰레기에 불과하지만, 한 마디 떼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던 과거에 비하면 이제 제법 그럴듯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원어민과 소통해야 하는 환경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 되는 영어나마 내뱉으려고 노력했던 덕일 것이다. 수재가 아닌 탓에 수십 번을 반복해서 들어야 겨우 영문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수십 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고 듣고 찾아봤던 덕일 것이다.  


  그 3년의 세월 동안 나는 무수히 좌절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만이 가지는 독창성이라는 커다란 무기가 때때로 무르익은 이들의 기술적 노련함을 앞서기도 했던 미술 세계와는 달리 영어는 순전히 노련함만이 승리하는 세상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20대 후반에 영어를 시작해 승부를 볼 수 있는 영역이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해도 남들보다 잘하지 못할 텐데 열심히 해봤자 무엇하나 하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한 적도 있었다. 열심히 만들어서 외워간 영어 문장을 당황하는 바람에 원어민 앞에서 더듬거리며 내뱉을 때면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달려가 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기어갈지언정 계속 했더니, 신기하게도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점차 사라졌다.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맛이 얼마나 통쾌하고 즐거운지를 몸으로 익히자 타인과 비교 같은 걸 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지 깨달았다고나 할까. 


  게다가 영어는 내게 새로운 세상을 선사해 주었다. 남들이 나보다 얼마나 더 잘하든, 20대 끝자락에 영어를 시작한 내 눈앞에 어떤 한계선이 그으져 있건 상관없이 영어가 열어 준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아름다웠다. 그 새로운 세상에 비하면 나보다 잘하는 남들과의 비교는 단물 빠진 풍선껌처럼 아무짝에도 쓸모도, 맛도 없는 놈이었다. 노련함보다는 지금 가진 실력을 어떻게 써먹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노련함만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던 영어의 세계에조차도, 뜻밖에도 창의력을 발휘할 구석은 곳곳에 많았다. 기본적인 실력은 물론 갖춰야겠지만, 그걸 어떻게 써먹느냐는 결국 가치관과 철학 그리고 관점에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언젠가 다시 붓을 잡게 될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했노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으려 한다. 한 길을 꾸준히 가지 않고 여러 길을 돌아간 사람으로서 몇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모든 일에는 다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뜻깊고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는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존재자체가 다소 어설픈 사람이다. 타고나길 그렇다. 당장 오늘만 해도 실컷 한 페이지를 필사하고 나서야 노트를 뒤집어 놓고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심지어는 노트의 첫 장이 아니라 맨 마지막 장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계속 거꾸로 써야 하나, 아니면 다음 페이지부터 똑바로 써서 바로잡아야 하나. 


아직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다만, 덕분에 아침부터 웃을 거리가 하나 생겼다는 점에서 마음만은 한껏 기쁘다. 



헤매도 괜찮다, 는 말은 이제는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을 좀 돌아가도, 남들보다 좀 모자라도, 이 생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원하는 만큼 대단해질 수 없다 해도 괜찮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런 것 따위 이루지 못해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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