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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Mar 11. 2023

고통을 피하며 살고자 마음먹었던 이유


 요새 '더 글로리'가 한창 핫하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더 글로리'이야기에 어느새 귀를 쫑긋 세우곤 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 드라마를 보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혹시라도 안 좋은 감정이 올라올까 봐 지레 겁을 먹어서다. 무의식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우연히라도 건드려질 때마다 숙주를 아프게 한다. 평온한 일상생활을 위해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하거나 감정이 건들릴 만한 작품은 어지간해서는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어릴 적에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다. 열두 살 무렵이었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기억나진 않지만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것, 아무도 내게 말 거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누구라도 내게 말을 걸면 따돌림을 주도하던 패거리에게 보복을 당하곤 했다는 것 정도는 떠오른다. 


 더 글로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수위의 폭력은 없었다. 맞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말과 눈빛으로는 참 많이도 맞았다. 머리카락을 귓 뒤로 넘기는 것과 같은 사소한 동작 하나로도 "예쁜 척하느냐"는 등의 황당무계한 욕을 먹어야 했고 식판에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적도 있었다. 그저 등교를 하고 있을 뿐인데,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쉬는 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었을 뿐인데 시도 때도 없이 패거리에 둘러싸여 온갖 쌍욕을 다 들었다. 

 소풍이라도 가게 되면 큰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가기 싫다고 드러누워 떼라도 쓸걸 그랬다 싶지만 부모님은 엄격한 분들이었으므로 그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무도 나와 같은 조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저 애들끼리의 사소한 알력일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하필이면 나를 괴롭히는 무리 속에 넣었다. 그다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때 만났던, 지금도 가장 친한 한 친구와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좋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거의 항상 같은 옷을 입고 다녔고 그 때문인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었다. "기억이 안 나. 아마 살려고 잊어버렸나 봐."친구가 말했다. 나도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한 부분은 거의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사건'과는 별개로 후유증은 깊게 남아 거의 20여 년간을 함께 했다. 내가 겪은 따돌림 후유증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시선 공포증, 환청과 환시.

 그 시절, 나는 늘 바닥을 보고 다녔다. 혹시라도 그 무리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욕을 먹었기 때문이다. 아무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면 고개를 들고 다니면 안 되었다. 따돌림에서 벗어난 후에도 어디서 누군가가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수시로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저 멍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인 사람조차 마치 나를 노려보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정말이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귓가에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중이라도 그랬다. 머리로는 지금 이 자리에 사람들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 같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영상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2. 뿌리 깊은 패배감. 

 꽤 오랜 기간 동안 누구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 일을 겪다 보면 세상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믿지 못하니 늘 마음속이 불안하고, 마음이 불안하니 손대는 일마다 오래 붙들지 못하고 놓아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패배감의 쓰라림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일상에서 집요하게 따라 다녔던 괴롭힘은 내게 '나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잘못된 자아상을 심어 주었다. 


3. 타인을 믿지 못함.

 나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기대를 거는 사람이다. 차라리 무심한 성격이면 나았을까. 그러지 못한 나는 타인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상황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스스로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자아상이 생겨 버린 탓인지 누군가 내게 잘해주면 의도가 있을 거라 여겼고, 설령 그 마음이 진심이더라도 나중에는 싸늘하게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언제든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두곤 했다. 덕분에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차갑고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아마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4.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한 공포.

 나는 실화에 바탕을 둔 스릴러 영화를 보지 못한다. 현실에서 일어 남직한 사건이 나오는 작품,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다큐도 어지간해서는 보지 않는다. '피해자'가 된다는 느낌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별 다른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는 일이 얼마나 아픈지 아는 사람 입장에서 실제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나 현실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다룬 작품은 보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거나 묻지 마 폭행을 당하는 등의 일이 내게도 닥칠까 봐 공포에 떤 적도 많았다. 따돌림을 당할 당시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어른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혹시라도 억울하게 피해 보는 일이 생길까 봐 더욱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다. 






 서론이 길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것이 내가 고통을 피하며 살고자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다. 마음이 괴로운 삶은 삶이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돌림의 마수에서 겨우 벗어나서 한숨 돌렸을 무렵 나는 다시는 고통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평생 흘릴 만큼의 눈물, 평생 느낄 만큼의 억울함과 고독과 슬픔을 삶의 어느 한 구간에 짧고 지독하게 다 겪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앞으로 내 삶에 고통을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는 일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던가. 이후로도 마음의 고통은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특히 따돌림 후유증을 치유하고 남들처럼 가슴을 펴고 걷고, 평범하게 돈을 벌며 사는 데까지 15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거의 20대 후반까지도 10대 때 이미 다 소모되어버린 감정이 채 다 회복되지 않아 무언가를 희망적으로 시작하고 이끌어 갈 에너지가 없었다. 그런 에너지는 이미 다 닳아버렸고 앞으로도 재생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 확신이 무색하게도 30대가 된 지금은 그때 했던 판단이 틀렸음을 안다. 이제는 새로 시작할 힘이 있다. 마모된 감정의 우물에도 다시금 샘물이 찼다. 다시는 고통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10대 시절에는 감정적으로 고통받는 일이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던 나머지 그런 인생을 살 바에는 아예 살지 않겠다고 진저리친 것에 가까웠다. 최대한 고통을 피하며 사는 태도 자체는 그 시절에 확립되긴 했지만 지금은 조금 결이 다르다. 이제 나는 굳이 괴롭게 살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 때문에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 에피쿠로스의 말마따나 어찌 보면 육체적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심리적 고통이니까.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건 생물의 본능이다. 나는 동물이므로 자연히 본능에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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