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다이어리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된 마음들은 남다른 힘을 갖는 듯하다. 이번 '햄스터 쿠션' 영상을 만들면서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되었던 점도 바로 그 힘이었다. 15년 동안 한 인형을 아껴온 사랑, 인형이 계속 낡아가는데 그 인형 없이는 못 지낼 것 같아 새 인형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간절함, 그 간절함들을 맞이하는 환대, 보답하고자 하는집념까지...
출근길에 본 트위터 글이 시작이었다. 성업 플러스 사의 햄스터 쿠션이 15년 만에 재출시되었는데, 어릴 적 이 쿠션을 아끼며 사용하던 이들이 2,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인형을 간직하고 있었고, 재출시된 새 햄스터와 헌 햄스터를 함께 두고 찍은 사진들이 공유되며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오래 아끼는 마음, 특별한 애착 따위에 특히나 약한 나이기에 그 사연들이 궁금해졌다. 지금은 더 심해졌지만 예전에도 사실 캐릭터 인형들이 더 인기가 많았었고, 촉감 좋은 인형들은 지금도 참 많은데 대체 무엇이 이런 매니아층을 만든 건지, 재출시까지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다.
회사 건물에 도착해 먼저 전화부터 걸었다. 이 아이템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리고 컨택을 먼저 해놓고 이야깃거리를 파악해두어야 아이템 통과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출근하고 맞이한 두 번째 월요일이었기에 가슴이 또 쿵쾅쿵쾅 요동쳤다. 다행히 직원 분들께서 정말 친절하게 맞이해주셨다. 이후로 소통을 담당하신 이 부장님은 특히 무척이나 따뜻한 성정을 가지셨는데, 햄스터 쿠션이 SNS 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상황에 대단히 벅차고 기쁘고 감사해하시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아이템이 통과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스스로 기획한 첫 아이템이었다. 다시 부장님과 통화해 이것저것 여쭤보는데, 사장님과 직접 통화를 해보라고 약속을 잡아주셨다. 실무를 해온 건 아무래도 직원들이었을텐데...'사장님께 직접이요...?'의아해했더니 사장님이 직접 원단 찾고 중국 출장 다니고 많은 노력을 쏟으셨다고 한다. 일선에서 직접 발로 뛰며 재출시까지 성사시킨 사장님이라니...! 더 흥미로워졌다.
변 사장님은 행동가이자 개척가 타입의 리더였다. 햄스터 캐릭터들이 유행하니 여기에 실용성을 더해보자는 아이디어로 햄스터 쿠션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미 레드오션이었던 인형계에 햄스터 쿠션을 잘 데뷔시키기 위해서 직접 엑센트니 CNA니 알파니 하는 팬시점을 방문하며 '영업'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냥 인형에다 침낭기능을 더해 영유아 낮잠용 뽀로로 침낭을 개발하는 등 열정은 여전하신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었다. 판매가 되는 제품이기 때문에 제품 홍보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건 '스토리'들이었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주변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니 끈덕지게 재출시 요구를 해온 이들, 그러니까 '햄스터 인형 집착공' 분들에게 집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최고의 방안이긴 한데 일반인을 섭외할 수 있을지... 심지어 네이버 스토어 구매 후기만으로는 구매자에게 직접 컨택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온 동앗줄이 이 부장님이었다. 유비무환적 업무스타일을 지닌 이 부장님이 그간 전화 문의를 한 이들 목록을 정리해두었던 것이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리스트에 정리되어있었고 여러 차례 문의한 VIP들은 따로 표시가 되어있었다. 그 중 두드러지는 업적을 지닌 분과 다행히 연결이 되었다. 이 햄스터 쿠션을 9마리나 새로 들였다는 J님도 나를 반겨주셨다. 서울에 사신다고 했고 마침 시간적 여유가 있는 시기라고 하셨다. 아싸! 예감이 좋았다. 혹시 영상에 출연도 가능하시겠냐고 제의를 드렸는데, J님은 자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선 분들이 많아서 망설여지신다고 했다. 겸손한 분이셨다...! J님은 또다른 블로거 분을 소개해주시기도 했다.
과연 일반인 집착공을 섭외할 수 있을 것인가... 막막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이 인형을 애타게 찾고 문의하는 네이버 지식in 글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는데, 제대로 보니 성지글 같은 답변이 하나 있었다. 요는 회사측에 문의해보았고,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는 것인데, 이 내용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쓰여있었다. 신뢰 가는 이 답변에 많은 집착공들이 모여들었고, 이 답변에 서로 댓글을 달면서 상황 공유를 하고 있었다. 감동... 앞서 등장한 J님도 이 답글에 댓글을 단 흔적이 있었다. 다들 이 인형의 재탄생을 위해 꾸준히 관심과 정성을 쏟고 있었다.
단서는 알파벳 두 개가 전부였다. 아이디가 다 나오는 게 아니라 제일 앞의 알파벳 글자 두 개만 나오고 나머지는 별 표 처리(*)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컨택을 할 수도 없고... 마치 탐정이 된 것처럼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 분은 필히 햄스터 쿠션을 구매하고 후기를 올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판매자가 접근할 수 있는 구매자 리스트에 알파벳 단서와 꼭 맞는 아이디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다행히 구매자 리스트를 조회하지 않고도 이 부장님은 이 답변자 분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며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L님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L님은 현재 서울에서 꽤 멀리 있는 곳에서 거주 중이신데, 마침 서울 출장 예정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통화를 화요일 늦은 오후에 했는데, 수요일 목요일에 서울에 올라올 일정이 있었고, 무엇보다 더 놀라운 점은 출연 의향이 있으시다는 거였다. 이 햄스터 쿠션을 얻기 위해서 정말 오래-10년 정도 꾸준히 찾아왔다고 한다- 노력해왔고, 다른 사람들의 노력들이 더해져 크나큰 성과가 있었기에 이 상황을 자축하고 싶어하시는 걸로 보였다. 그래서 내향형이신데도 불구하고 선뜻 응해주신 것이다. 촬영 조율을 후닥닥 마치고, 통화 바로 다음 날 L님을 만나 인터뷰 촬영을 진행했다.
보조가방에 새 햄쥐 한 마리, 낡고 낡은 헌 햄쥐를 담아 오신 L님은 열 다섯 살이 된 헌 햄쥐, 아니 '햄순이'를 만지며 인터뷰할 때 유독 편안해보이셨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고, 반려 동물은 키울 수 없었던 어린 시절 햄순이는 특별한 친구였다고 한다. 매일 함께하다보니 햄순이를 안고 자는 게 너무 당연해져버렸고, 그렇게 햄순이가 보물 1호가 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다며 지연 님은 기분 좋게 인터뷰를 마치고 총총 떠나셨다. 불룩한 가방과 함께...
다음 촬영은 변 사장님 인터뷰 촬영이었다. 인형으로 가득 메워진 책장을 배경으로 두고 분홍 니트를 입은 사장님의 모습을 찍으려니 그 영상 자체가 참 예뻤다. 재출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화들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햄스터 쿠션이 나왔던 00년대 중반과 지금의 인형 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 제조공장이 대부분 중국으로 이전해 새 원단을 개발하기가 아무래도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미 생산이 중단된 원단을 새로 만드는 까다로운 주문이기에 많은 곳에서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 집념 하는 변 사장님은 포기하지 않고 한 번에 2~3달 걸리는 샘플 제작만 여러 차례, 결국 그 시절 햄스터와 가장 유사한 햄쥐를 팬들에게 안겨줄 수 있었다.
인형은 안는 느낌이 특히 중요하기에 수도 없이 안아봤을 거라는 대답이 왜인지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한번 안으신 채로 한 마디 해주세요' 요청드리니, 쑥쓰러워하시면서도 마치 아기를 안은 양 둥가둥가해주는 모습이 참 유쾌했다. 햄스터도 은은한 웃상인지라 더욱 사랑스러운 장면이었다. 첫 출시가 2004년이니 올해로 열 아홉이 된 거라 "소주 한 잔 하자"라는 쿠키 영상으로 딱인 킬링 멘트도 해주셨다-1년 더 기다리시긴 해야한다-. 촬영을 마무리하고 다시 차에 오르는데, 해가 거의 다 넘어간 시흥의 일몰이 무척이나 예뻤다.
첫 영상인데다 인터뷰 촬영을 두 분이나 한 탓에 구성과 편집이 만만치 않았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완성되어 주말 오전 영상이 공개되었다. 한창 핫했던 시기가 살짝 빗겨나 있었기에 폭발적인 반응이 온다거나 두드러지는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영상을 만들기까지 소중한 마음들이 함께했었다는 것에 감사해진다. 방금 헌 햄스터이든, 새 햄스터이든 주인 곁에서 사랑받고 있을 상상을 해보았는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감사하게도 사장님이 선물해주신 내 햄쥐는 지금 회사 의자에서 내 경추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음... 그냥 집으로 데리고올까 보다.
22.03.13.
햄스터인형 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WDmQr_TnMQ&t=3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