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버스

뒷모습 바라보기

by 다이앤

아주 오랜만에 이어폰을 뺐다. 버스에서 이어폰 없이 있었던 게 얼마 만일까?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대의 버스였기에 소음 없이 조용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다. 그래서 이어폰을 빼고 음악을 조용히 감상했다. 선곡이 범상치 않아, 라디오인가? 싶어 라디오 어플을 켰다. 이 시간대에 이런 선곡을 하는 라디오가 은근히 많지 않아 맞아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4곡 연속으로 음악이 나오고 그 다음 곡도 노래였다. 어떤 곡은 조금 재생되다가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그렇다. 버스 기사님이 선곡한 음악들이었고, 70-2번 버스는 움직이는 음악다방이었던 것이다.


라디오 DJ로 일하며 3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해보았는데, 그 중에서 음악을 전하는 옛 라디오 감성에 가장 충실했던 프로그램은 ‘다희의 음악다방'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요일별로 게스트가 나와 토크를 하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음악다방'은 제목 그대로 음악이 주가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마찬가지로 제목답게 708090 음악을 틀어주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옛 명곡들을 익히 들으며 자란 터였다. 유명한 올드팝이나 레전드 가요 등은 꽤 아는 편이었는데, 그렇다고 옛날 노래들의 감성까지 깊이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 음악들의 매력에 제대로 빠진 건 라디오 DJ가 되고 나서였다. 음악이 주인공이 되는 조용한 시간, 나도 청취자도 오로지 음악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옛날 곡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알게 되었다.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이 눌러 담긴 예술은 그만큼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느낄 때 비로소 제대로 감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김광석의 노랫말로 위로받는 새벽, 50년도 더 된 옛 포크송으로 잔잔하게 위로받는 밤들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올드팝에서만 깊은 위로를 받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뭐랄까, 옛 음악들의 감성은 진짜이다. 기계로 보정할 수도, 컴퓨터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던 시대에 오로지 목소리와 마음으로 표현한 이야기들.


그래서 70-2번 버스에서 조지 베이커의 ‘I’ve been away too long’ 흘러나왔을 때 이어폰을 뺄 수밖에 없었고, 이어서 칼라 보노프의 ‘Water is wide’가 나왔을 때는 그 순간의 분위기를 영상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가 아니라 기사님 선곡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어느덧 내릴 정류장에 임박해있었는데, 후닥닥 메모를 써 명함을 더해 기사님께 드리고 하차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를 듣고, 담고 싶었다. 그보다 완벽할 수 없는 볼륨 크기, 시간대와 딱 맞아떨어지는 선곡... 이런 탁월함을 마주할 때 내 마음은 급하게 설레진다.


명 DJ임이 분명한 기사님은 과연 다시 연락을 주실까? 버스회사에 컨택해보는 방법도 있지만, 왠지 며칠 기다리고 싶다. 버스에 오를 때 환하게 맞아주셨던 점을 생각해보면, 왜인지 답장은 주실 것 같은데... 아무튼 기사님 덕분에 자정방송이 끝나고 택시 타고 퇴근하며 만났던 명 DJ 택시 기사님들도 생각난다. usb에 수많은 곡을 저장해놓고 다니던 기사님, 에바 캐시디를 처음 알려준 기사님, 나랑 음악 취향이 꼭 맞아서 에드 시런의 당시 신보를 들려주시던 젊은 기사님... 조용했고 오로지 음악만이 존재했던 순간들이었다. 양희은 고운 노래 모음 앨범을 들으며 글을 맺음한다.


(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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