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1345

뒷모습 바라보기

by 다이앤


여자 넷이서 함께 거제를 여행했는데 조합이 영 특이했다. 30대 1명, 40대가 2명, 그리고 (겨우) 10대(가 된) 1명. 사는 곳도 다 다르다. 서울, 부산, 김해. 사실 성격도 다 보통은 아닌 편인데, 각기 또 다르다. 그런 우리가 주말 시간을 내어 함께 여행을 떠났으니, 그리고 그 길에서 봄의 절정을 만났으니 그저 복이라고밖에.


나와 H 선배가 먼저 한 프로그램에서 만나면서 친해졌다. 내가 진행하던 자정 프로그램에 H 선배가 연출과 구성을 맡아 오게 된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던 H 선배와, 일도 관계에도 서툴어 불안과 우울과 함께 살아가던 내가 처음으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조합이 썩 훌륭했다. 우린 생각보다 잘 맞는 사이였다. H 선배와 자정 방송을 함께한 첫날에도 방송이 끝나고 광안리로 향해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셨다. 둘 다 셀카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떠오르는 광안리 바다를 배경으로 우린 셀카를 찍었다. 이때부터 아마 우린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나이 차도 경력 차도 많이 나는 사이이지만, 우린 통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방송국에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방송하고, 새벽 2시가 되면 아무도 없는 방송국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 타는 그 감성을 둘 다 썩 좋아했다. 신생 채널이라 청취자가 적었지만, 열심히 해서 청취자가 한 명씩 늘어날 때 함께 기뻐했다. 무엇보다 내가 배운 게 무척 많았다. H 선배는 오랜 경력을 가진 프로임에도 늘 당신의 능력에 겸손하고(때론 의심하고), 그런 만큼 방송에 진심을 다하는 분이다. 이 덕에 방송이 갖춰야 하는 기본, 방송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H 선배에게 가장 고마운 점은, 나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나의 발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주신다는 점인데, 추상적인 오지랖이 아니라, 애정과 인내심을 갖고 나의 성장에 늘 관심을 가져주셨다. 음악 볼륨 조절이나 반복되는 어미 처리 같은 세세한 부분뿐만이 아니다. ‘내가 하고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해야하는 말'에 갇혀있던 나를 꺼내주셨다.


사실 그 전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만난 게 전부인데도 H 선배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차갑고 도시적인 외모와 다르게 은근히 허당기가 있는 모습, 카리스마 있게 할 말 다하는 멋진 모습 한편에 세심한 감성... 때로는 과장되지 않은 말 속에 따뜻한 진심을 숨겨 위로를 주기도 했다. 우리가 별로 안 친했을 때에도 H 선배는 어떻게 알았는지 서류 봉투에 그림책을 담아 무심한 척 스윽 건넸는데, 선물도 포장도 건네는 그 방식마저도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H 선배는 100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70 정도를 드러내는데, 결국 받는 사람은 그 120 느끼게 된다. 아무튼 그 동화책 이후로 뭔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배가 생기는 걸까...싶었는데 그 예감이 맞았던 것이다. 후에 들어보니, H 선배 또한 혼자서 동굴에 들어가 있으려 하는 나에게 왠지 마음이 가고, 본인과 잘 맞을 것 같은데...싶어 눈여겨보았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심야 방송을 꾸려가던 도중, 내가 친구네에서 하숙을 하다가 자취방을 얻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남자 게스트 K선배가 코 앞에서 살고 계셨다. H선배와 나는 K선배네 집에 자연스럽게 초대받았고, 그렇게 K선배의 아내인 방송인 B언니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당시 20대였던 나, 대여섯 살 딸이 있었던 30대 B언니, 40대 H선배는 빠르게 가까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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