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바라보기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가평으로 향한 건 금요일 늦은 오후였다. 아직 많은 이들이 일을 마치지 않는 그런 애매한 시각, 반차를 낸 한 사람과 일터에서 (자체) 조퇴를 한 한 사람이 모여 생애 첫 캠핑을 하러 나섰다. 고속버스를 타고 내가 있는 곳까지 와준 E를 우리집 근처 지하철역 앞에서 태웠다. E는 예쁜 튤립과 함께였다. 꽃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원예농협 근처에 사는 E가 또 마음을 써주었다! 튤립과 좋은 여행이 될 듯했다.
일이 워낙에 안 풀리는 한 주였기에 마냥 마음이 가볍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행을 떠나는 길은 신나는 법이다. 우리는 마트에도 잠시 들러 이것저것 장을 보고, 살짝 출출해질 무렵 캠핑 사이트에 도착했다. 이번 캠핑은 캬라반에서 지내는 캠핑이었다. E도 나도 제대로 캠핑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성실하고 꾸준한 E 덕에 우린 인기가 많은 캠핑 사이트의 캬라반을 잡을 수 있었다. E는 금요일 예약은 종종 취소표가 풀린다며, 아마 일 빨리 끝내고 가려던 직장인의 기대가 좌절로 돌아온 경우일 거라고 추측했다. 가슴이 아프지만,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3번 캬라반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캠핑장에는 일찍 도착해 이미 테이블 세팅도 다 하고, 바비큐를 해 먹는 집(?)들이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스크도 벗고 둘러앉아 얘기 나누고, 애들은 불 들어오는 킥보드를 타고... 새로운 기분이었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물론 캬라반이 물성도 있고 모양도 딱 잡혀있긴 하지만, 그래도 땅을 일정 정도 구획해 ‘여기가 당신네가 머물 곳이다!’라고 하는 캠핑의 개념이었다. 어릴 적에 나뭇가지로 흙에 표시해놓고 ‘여기까지 내 땅!’하며 놀던 느낌이었다. 진짜 땅만 주어지고 텐트도 뭐도 직접 건설(?)해야 하는 진짜 캠핑은 더더욱 이런 느낌이 나겠다, 싶으면서도 장비를 갖출 생각을 하면 우린 캬라반이 낫겠다... 고개를 저었다.
오는 길에 이미 출출했던 나는 캬라반 안에서 주꾸미 볶음 밀키트를 꺼내어 조리를 시작하고, E는 캬라반 타프를 치고 전구를 걸고 정돈했다. 연둣빛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앉아 예쁜 조명을 켜두고 먹는 시간은 무척이나 좋았다. 봄밤이었다. E는 요즘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라며 90년대생이라면 까무러칠 가요 선곡 모음을 틀었는데, ‘국민가수’ 출신 박창근 노래를 계속해서 트는 맞은편 집의 중년들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분위기 있는 힙한 노래도 좋지만, 왜인지 요즘엔 구수한 것들이 더 좋다. 20대 때는 참 중요했던 것들 중에 나이가 먹을수록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이 변화가 나는 좋다. 그렇게 우리는 윤도현, 테이 등의 노래를 들으며 맥주캔을 부딪쳤다.
그러다 불멍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해서 걸음을 옮겼는데, 영업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거니와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그때 E가 편의점에 들러 유심히 장작 존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부싯돌 대용 나무’ 따위를 집어들고 사자고 하는 게 아닌가. TV에서 보니 불멍을 하려면 큰 장작들도 있어야 하고 토치도 있어야 하던데, 장비가 없는 우리는 못하지 않나 나는 일찌감치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E가 작게나마 피워라도 보자며 작은 나무를 사고, 불꽃 빛을 예쁘게 바꿔주는 무언가도 함께 샀다.
그리고 우린 알게 되었다. 캠핑엔 불멍이라는 것을... 불이 피어오르니 따뜻하고 예쁘고, 생각이 비워지면서 모든 게 다 좋았다. 불타는 냄새도 좋고 환해지고 분위기 자체가 영 달라졌다. 그렇지만 우리가 산 건 불을 피우는 역할만 하는 작은 나무였기에 불은 금방 잦아들었고, 우린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마른 낙엽이며 나뭇가지 등을 급하게 공수했다. 물론 역부족이었다. 나는 장작 사 올게! 외치고는 바로 편의점으로 다시 달려갔다. 편의점 직원 분이 정말 잘 말랐다, 너무 상태가 좋은 장작이다라며 장작을 치켜세웠다. 아, 장작은 잘 마른 점이 셀링 포인트구나! 즐거워하며 장작을 샀다. 난생처음 장작을 소유해본 나는 장작이 든 초록색 망을 들고 기쁘게 달렸다. 장작을 다 사보다니! 그리고 잘 마른 완벽한 장작이라니!
역시 장작이 있으니 불이 정말 잘 타올랐다. ‘나무가 없는 불'이라 힘이 약하다던 내 사주가 다시금 안타까워질 정도로. 불의 색깔이 새삼 아름다웠다. E와 나는 캠핑장에서는 장작이 최고구나, 부자가 다른 게 아니라 좋은 장작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불멍을 했다. 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본 적이 있었던가. 화로 안을 이리저리 쑤시면 새로운 곳에서 불이 솟아났다. 불이 작아지면 또 그대로 아름다웠다. 거의 꺼져갈 때는 마치 보석 같았다. 불의 그 따스함, 빛을 머금은 얼굴들, 여유로운 사람들, 최고로 신난 어린이들. 캠핑의 맛을 7할은 느낀 밤이었다.
다음 날, E는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만들어주고 나는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었다. 초록이 가득한 곳 한가운데에서 먹는 조식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깨끗이 잘 정리하고 우리는 캠핑 사이트 근처 호숫가에서 물멍을 하기로 정하고 캬라반을 떠났다. 내 차 겸손이 트렁크 안에 장작 반절을 남겨두고서!
22.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