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2017)> : 사랑을 찾는 구체적인 방법
영화 리뷰
줄거리보다도 여운이 가슴에 남는 영화가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캐릭터의 이름도, 줄거리도, 결말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버스에 올라 영화 음악을 들으며 내내 마음이 아팠던 것, 여운을 곱씹다 우연히 길가 상점의 쇼윈도에 얼굴을 비춰봤던 순간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는 영화들. 내게 <내 사랑(2017)>은 그런 영화였다. 마침 싱어송라이터 리사 해니건의 목소리를 좋아했기에,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흘러나오던 ‘리틀 버드(Little bird)’를 종종 찾아 들었고 그럴 때마다 먼지 쌓인 정서가 떠오르곤 했다.
그러다 무주의 산골에서 이 영화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이미 봤던 영화였지만,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올해 처음으로 시작된 ‘토킹 시네마’ 프로그램에 번역가 황석희가 참여한다는 소식에 흥미가 갔다. 황석희 번역가가 무주산골영화제와 어울릴 것 같아 고른 영화가 바로 이 <내 사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좋아하던 작품을 모처럼 다시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엔 5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아마 5년 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모드(샐리 호킨스)와 에버렛(에단 호크)의 관계에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20대 중반쯤이었고 그때 나는 한창 서로를 구원해주는 사랑, 세상에서 소외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스며들어가는… 그런 사랑의 아픈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30대가 되었다. 5년이란 짧다고도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내 인생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20대에서 30대가 되는 시기란 본래 그런 것 아닌가. 그 사이 나는 나에 대한 높은 기대치에 우울도 앓아보고, 내 취약함을 처음으로 바라봤으며, 무언갈 손에 쥐려 무거운 다리를 옮겨보기도, 손에 쥔 걸 마침내 놓아보기도 했다.
비로소 영화의 원제가 왜 모디인지 깨달은 것도 이 시간차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나는 에버렛과의 관계성보다도 모디가 현재를 바라보고 지나온 생을 조망하는 그 시선을 더 따라갈 수 있었다. 어쩌면 나름의 상실과 쇠락을 겪는 과정에서, 관계-특히 연애 관계-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나’로서 서는 근력을 길러진 게 아닐까. 애초에 원제가 ‘모디’이고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또한 모디가 그녀의 생을 돌아보는 말이므로, 어쩌면 감독의 의중에 좀 더 가까이 간 것일 수도 있겠다.
이쯤에서 영화 최종 시퀀스 부분에 재인용된 모디 대사를 옮기자면 이렇다.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The whole of life already framed).” 모디는 다정한 친구의 집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창문이란 참 신기하다. 똑같은 풍경인데도 네모 반듯한 창에 담기면 그 너머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다. 기차의 가로가 긴 직사각형 창, 층계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늘 나를 멈추게 한다. 모든 게 눈앞에 널려있으면 놓치게 되는데, 작은 프레임에 담기면 우리의 시선이 어딘가로 집중이 되서일까? ‘이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시오’라며 콕 짚어줘서일까?
모드는 창에 담긴 이러한 아름다움을 평생 들여다본 인물이다. 길에서 마주친 노새의 귀여움을, 눈 오는 날의 들뜸 같은 것들을 말이다. 분명 창 안팎으로 안 좋은 것들, 그녀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들도 많았을 텐데 모드는 좋은 것만 기억에 남기기로 결심했던 걸까? 타고난 다정함과 순수성 덕분일까? 그녀의 회복탄력성의 비결이 궁금해지긴 하지만, 아무튼 모드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또 마음속에 담는 작업을 이어갔다. 모디의 마음 깊은 곳엔 네모 반듯한 액자 프레임이 무수히 걸려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액자를 거는 과정이, 나아가 그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기는 그 과정은 모디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나는 그것이 모디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모디를 사랑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그림이라고… 나는 그림엔 젬병이지만 내 마음과 생각을 글로 풀면 한층 그 사유가 숙성되는 경험을 한다. 별 것 아니었던 일상도 글로 풀다 보면 괜히 더 재밌고 아름다운 부분이 부각되어 머릿속 저장 장치에 [최종]이라는 표시와 함께 저장된다. 아마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이러한 시간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작은 창과 물감이 가진 게 전부였던 모드에겐 어쩌면 그림은 행복에 이르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이자,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실체적인 방법이었을 수도.
거칠고 폭력적이었던 애버렛과 따뜻한 사랑을 끝내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림을 그리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았을까. 대충 보면 안 보이지만, 유심히 보면, 깊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구석이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한번 눈에 들어온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려는 모드이기에, 에버렛의 씨앗이 성장하는 것을 천천히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정한 사랑이 에버렛을 변화시켰고 관계를 무르익게 했고, 관객들을 속수무책으로 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에버렛이 수레에 모디를 태워 들판을 달리는 그 장면에서 어떻게 마음에 액자를 하나 마련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라와 톤 다운된 분홍 사이 어딘가에 있는 색감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원가족과 세상은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지만, 모드는 사랑을 발견했고 오래 기억했다. 숨을 거둘 때까지 나는 사랑받았노라고 말하는 모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붓을 들어 아름다움을 남겼던 모드를 나도 다시 한번 기억에 남기려 한다. 산산이 흩어져버릴 아름다움이 모드 덕에 지상에 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역행해 그 그림의 아름다움에 한번, 그 그림을 그린 모드에 다시 한번, 어느 순간 그 예쁜 것들을 눈에 담고 기억하려 했을 모드에게 또 한 번 위안을 받는다. 모드의 그림에 빚을 지기 위해서 엽서 한 장을 마련해보아야겠다. 무심결에 샀던 싸구려 물감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