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 계>의 두 주인공은 표정 변화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도 위장용 가면이 있기에 나름 있어보이는 것이지, 진실된 감정이 나오는 순간에도 표정 변화가 미미하다.
표정은 그렇다는 것이다. 대신 각각 '왕지아즈'와 '이'를 연기한 탕웨이와 양조위는 눈빛과 얼굴에 드리워진 분위기로 표현한다. 십 여 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감상했을 때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야 그들의 감정선이 조금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뚜렷이 오픈되지 않은 자즈의 내면이 훅 스미어온다.
배경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홍콩. 중국인 대학생 자즈는 우연히 애국 연극을 올리는 극단에 들어갔다가 무대 위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수많은 이로부터 주목받는 순간, 비로소 빛이 나는 순간. 자즈에겐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 시선들이 바로 자즈가 결핍되어 왔던 것이었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남동생만 데리고 좀 더 안전한 영국으로 떠났고, 이내 재혼 소식을 알려 온다. 극 초반 어딘가 스스로를 애매하게 여기는 듯한 자즈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 와닿게 되는 대목이다. 버림받고 외면당해온 자즈에게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과, 주변의 관심은, 자즈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뭔지도 모르면서 찾아온.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시대나 관계에 집중한 영화라기보다 여성의 심리를 심도 깊게 다룬 작품이라 생각한다. 조국을 위해 희생된 미녀 스파이라고 설명하기엔 자즈의 내면은 훨씬 복잡다단하다. 사실 자즈에게 조국의 안녕이라는 대의는 애초부터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친일파 숙청 작전에 동참하겠다고 말할 때에도, 조금 더 위험해지는 상황을 감수해야했을 때에도 다른 게 아니라 '내 존재감이 분명해지는 순간'에 저도 모르게 끌렸던 것이 아닐까. '막부인'이라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꽤나 만족스러워보였던 것도, 비단 '이'에 대한 마음이 회수가 되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무대의 압박을 감당해낼만큼 큰 배포와 대담함을 가진 재능 많은 여성이, 가정에서 또 사회에서 존재감이 지워지는 시간을 보낼 때, 발현되지 못한 에너지들이 어떤 모양이 될 수도 있는지 자즈는 보여준다. 어떤 사랑에 휘감길 수 있는지, 어떠한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지, 어떤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선택까지 하게 만드는지.
자즈는 끝내 동지들과 국가가 아닌 '이'를 선택한다.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봐주는 첫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를 도주시키고 거리로 나와 아무 전차나 잡아 탄다. 애초에 도망갈 생각이나 기대는 딱히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품의 하이라이트 씬이 등장한다. 빙글 빙글 돌아가는 자전차의 장식, 기사의 넉살 좋은 웃음, 통행로 폐쇄에 볼멘소리를 하는 아주머니와 이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자즈의 시점을 훑은 쇼트들이 천천히 지나가는 이 대목.
조직이 몇 년간 공을 들인 작전을 자신이 막 망쳤고, 그로 안해 자신은 물론 동료들까지 죽게 될 상황인데, 전차 위에서의 자즈는 그렇게 불행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해보이기도 한다. 추측건대 자즈는 막 인생에서 처음으로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근거해 결단을 내렸던 것일 거다. 영화에서 자즈는 주로 시선의 대상이 된다. 남성의 시각에서 은밀하게 바라봐지는 아름다운 실루엣이라든지 행위의 객체로 존재한다. 그런 자즈가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러서야 시점의 주인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어떠한 계기로 감정적으로 의식적으로 각성되었을 때, 익숙한 일상의 풍경들이 생생하고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자즈 시점으로 느리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쇼트들은 자즈가 '그 순간에'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의 상처에 매어있거나, 조직이 그리는 미래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현재에 존재한 것이다. 오로지 내 욕망으로 내린 첫 결정... 비록 그 끝이 비극일지라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큰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신으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를 도주시키고 공안에 체포되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어쩌면 자즈에겐 가장 진실로 살아있는 순간이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오랫동안 이 순간을 예상해왔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희망이 결여된 삶에서,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던 삶에서 유일하게 욕심이 났던 사람을 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내가 왜 그래야하지? 당연하니까? 당위란 무엇이지? 그를 죽이는 것이 정의인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 아닌 답이 없음을 확인해가는 질문 끝에 허무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친구같은 존재였으므로 이에 크게 동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자즈이기에 전차 위에서 자살약을 옷깃에서 떼어내놓고 먹지 않은 결정 또한 수긍이 간다. 이 대담한 여성은 결단을 내렸다면 책임을 지는 사람인 것이다. 자살약을 먹고 혼자 그나마 편안하게 눈을 감기보다는 동지들의 곁에 있기로 한 것이 아닐까. 동지들 또한 자즈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자즈, 올라 와." 극단 시절 동지들이 관객석에서 자즈를 불러내는 장면이, 자살약을 손에 쥔 자즈의 장면에서 플래시백으로 붙은 것이 바로 동지들에 대한 자즈의 감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인 듯하다. 자신을 무대로 올려준 이들. 나를 바라봐 준 특별한 존재들. 그들을 죽게 한 것이 비록 본인일지라도, 자즈 방식으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애석한 비극이지만 어차피 이미 자신이나 그들이나 삶이 비극이었다.
나로서 존재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인연들와 매듭짓고 자즈는 벼랑에서 추락했을 것이다. 자신을 원망하는 동지의 표정에도 의연한 그의 표정이, 그 정신이 자즈라는 인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얼굴이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몇 겹의 식민 하에서 자즈는 끝내 그로서 존재하고 홀연히 떠났다.
20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