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2022)> : 사랑은 안개에 싸인 듯

영화

by 다이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어심리학 수업을 들을 때 인상 깊은 예시를 접한 적이 있는데, 어느 문화권에는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나무의 초록과 바다의 파랑과 그 사이의 청록색도 한 단어로 표현되는데, 그래선지 실제로도 그 문화권의 사람들은 두 색을 구분하여 인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도 ‘초록으로도 보이고 파랑으로도 보이는’ 것들이 대놓고 많이 등장한다. 서래(탕웨이)의 원피스, 집 벽지, 펜타닐 캡슐뿐만 아니라 소파도, 책도 대체로 초록과 파랑 사이에 있는 색감을 띄고 있다. 영화는 친절하게 해진의 대사를 빌려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같은 걸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고, 다른 걸 같게 인식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주인공인 서래와 해준(박해일)은 아예 다른 언어권 출신이고, 같은 한국어를 쓰는 인물들 또한 모두 다른 언어의 세계를 갖고 있다. 숫자로 점철된 언어, 지역색이 짙은 언어 등… 서래가 종종 번역기를 쓰기도 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바가 온전하게 전달되진 않는다. 중국식 속담이 한국인에게 얼마나 와닿을 수 있을까? 서래가 중국어로 ‘심장’을 말할 때의 그 감정이 과연 한국어로 ‘마음’이라 번안될 때 다 담길 수 있을까? 한자에 능통한 서래가 ‘유일하다’ 대신 ‘단일하다’라고 표현할 때, 그것을 그저 외국인의 실수, 낯선 용법으로만 치부해도 될까? 빈번히 등장하는 ‘마침내’는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을까?


이러한 언어 사이의 충돌은 곧 각 인물들의 세계 간 충돌을 보여준다. 사랑이라고 말할 때 모두가 다른 것을 떠올리는 동상이몽을 드러낸다. 서래의 사랑은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사랑이 아니다. 함께 외식하고 예쁜 거리를 걷는 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직접 죽인 것 또한 서래에겐 사랑이다. 해준과 다시 만나기 위해 남편의 죽음을 앞당겨버리기도 한다. 버리는 사랑, 거두는 사랑, 영원히 종적을 감추는 사랑… 그가 보내온 삶을 짐작해볼 때, 어찌 그 누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해준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반문할 때 외에는 한번도 뱉지 않는 사람이다. 도덕성과 엄격함으로 쌓아올린 견고하고도 위태로운 성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침범할 틈은 없어 보인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래는 그런 해준에게서 사랑을 읽어낸다. 휴대폰을 바다 깊은 곳에 버리듯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해준의 말이, 비극과 비장미의 세계에 사는 서래에겐 더없이 깊은 사랑 고백으로 들렸을 테다. 영원히 자신을 버리겠다는 것, 눈 딱 감고 돌아서겠다는 것. 다른 이에게는 다른 색의 감정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서래에겐 분명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래는 망설임 없이 움직인다. 지키는 것이 없는 자,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자의 결심이란 적극적이다. 그리하여 결국 서래의 사랑은 아무도 못 찾을 바다 깊은 곳에 봉해졌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해진은 뒤늦게 사랑을 깨닫는다.


해준의 세계는 이제야 비로소 마침내 제대로 붕괴되었을지도 모른다. 구덩이 옆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진 것처럼. 그 허탈한 미소, 비로소 풀어헤쳐진 넥타이를 보고 있으면 ‘사랑, 참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랑이란 안개에 싸인 듯, 눈물에 번진 듯, 선명하게 받아들이기도, 분명하게 전달하기도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같지 않기에. 내게 파랗게 보이는 게 그에겐 초록으로 보일 수 있는 거니까. 나의 파랑과 초록이 그에겐 같은 걸로도 보일 수 있는 거니까.


문득 지난 연인이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서로 다른 이유로 관계 안에서 괴롭던 연애의 끝물이었다. 그는 이런 표현을 썼다. “다희는 뭘 지키고 싶어하는 걸까?” 난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난 뭔가를 지키려 했던 게 아니었다. 그의 세계는 뭔가를 지키는 세계였고, 당시 나의 세계는 뭔가을 잃지 않도록 애쓰는 세계였다. 그 문장으로 깨달았다. 참 말이 잘 통한다 생각했는데, 우린 서로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서로 비슷한 색인 척 위장하다 서서히 본색이 드러나고, 헤어질 즈음엔 두 사람 모두 색이 바래져있었다.


그렇기에 온전히 번역되지 않았음에도 홀로 선명히 빛났던 서래의 사랑이 여운처럼 길게 내 마음에 남는다. 아니, 내 심장에.


2022.07.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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