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1, 2교시. 상담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집단 상담을 두 시간 해주시는 날이었다. 일 년에 얼마 되지 않는 상담 시간이라 전날부터 아이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상담 선생님은 밖에서 전문 상담가로 활동하시다가 올해부터 학교에서 상담 선생님으로 오셨어. 너희 상담 받는 거 되게 운 좋은 거야~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해. 알겠지?"
"네."
그렇게 상담 잘 들으라고 약을 쳐놓고 두 시간 동안 아이들을 위클래스로 보냈다. 그리고 그 날 점심 시간. 급식실 옆 자리에 상담 선생님과 함께 앉게 되었다.
"선생님 5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시죠?"
"네 맞아요."
"아니 애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 해요?"
"네?"
"나 이때까지 수업하면서 제일 편했잖아. 너무 조용하게 잘 해요 애들이. 그래서 제가 애들한테 '이야 너희 너무 잘 한다, 어쩜 그래?' 그랬더니 얘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뭐라고 했어요?"
"저희 담임 선생님께서 그렇게 가르쳐주셨어요, 이래요. 호호호~"
내 얼마 되지 않는 교직 생활을 통틀어 아이들이 힘들다, 수업이 어렵다 하시는 말씀만 들어 봤지 이렇게 극진한(?) 칭찬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번 죄송합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하고 고개만 꾸벅이다가 이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얼떨떨했다. 기쁘지만 민망하기도 한 마음에 "하하. 그랬어요? 선생님께서 편하게 수업하셨다니 다행이에요~" 하고 먹던 밥을 마저 먹는데, 옆예 계시던 특수 선생님께서 툭 던지셨다.
"어우, 선생님. 최고의 스승의 날 선물이네요!"
아, 맞다. 내일이 스승의 날이었지. 한 번도 대수롭게 여겨본 적 없던 날이었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여느 스승의 날 선물이나 이벤트보다, 나 없을 때 애들이 참 참하고 잘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이 정말 가장 기쁘고 울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겸손이 미덕. 특히 우리 반 애들 예쁘다고 미주알 고주알 말하고 다니면 각자의 힘듦이 있는 선생님들께 듣기 좋은 소리 못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괜시리 밍숭맹숭한 웃음과 리액션만 보이고 밥을 끝까지 먹었다.
그렇지만 단전에서부터 빠듯하게 올라오는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너무, 너무 뿌듯했다. 아이들이 예쁘게 행동한 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내가 아이들에게 그토록 전달하고 싶어했던, 그러나 늘 얘네의 마음 깊숙한 곳에 가닿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메시지들을 아이들도 모르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 온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확답받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반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민승이가 누가 봐도 수상한 몸짓으로 걸어오며 말을 붙인다.
"선생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스승으 날~"
"맞아요, 스승의 날이에요. 어.. 스승의 날인데.."
딱 봐도 내가 교실 들어갈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이벤트에 도통 아무 흥미가 생기지 않는 나는 -스승의 날이라니 너무 민망할 뿐. 나는 스승인가? 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우와~"
문 바로 안쪽에서 여자 아이 두 명이 가짜 꽃잎들을 뿌려줬다. 빵빵하게 분 풍선과 불다 만 듯한 풍선 몇 개가 칠판에 붙어 있고, 아이들이 포스트잇에 쓴 짤막한 편지로 화이트보드가 듬성 듬성 꾸며져 있었다.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미소 모드 장착.
"우와 얘들아~ 이게 다 뭐야? 너무 고마워~"
사진도 찰칵찰칵. 자리에 앉자 몇몇 아이들이 꼬깃꼬깃 접은 편지를 전해주러 왔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복덩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복동이'라고 써온 편지도 있고, 평소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던 조용한 여자 아이가 써와서 조용히 흐뭇했던 편지도 있다.
그러고 아이들이 다 모인 오전 9시. 아침 인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얘들아. 스승의 날이라고 이렇게 축하해줘서 너무 고마워~ 그런데 있잖아. 선생님은 어제 더 큰 스승의 날 선물을 받았다. 그게 뭐게?"
"케이크..?"
"아니, 더 귀하고 값진 거야."
"모르겠어요~"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어제 상담 선생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했다. 상담 선생님께서 너무 너무 칭찬하시더라며, 선생님이 정말 기쁘고 뿌듯했다고, 받아 본 스승의 날 선물 중에 단연 최고였다고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선생님이 너희들이랑 있을 때 가장 뿌듯한 순간은 두 가지야. 첫 번째는 어제처럼 선생님 안 계실 때 너희들이 잘 하는 거. 그건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고 생각해서 선생님은 참 뿌듯해. 두 번째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주는 거야. 못 하는 친구에게도 괜찮다고 해주고, 도와주고 이끌어 줄 때도 참 기쁘다. 그건 어른들도 잘 못 하는 거거든. 근데 우리 반이 벌써 이 두 가지 순간을 모두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아. 선생님한테는 너희가 이미 선물이고 복이란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지내보자, 우리."
"네~"
에고.. 마음을 담은 칭찬을 하는 순간은 어찌나 머쓱하고 민망하고 부끄러운지. 뻔뻔하고 당당하게(?) 감동이 물결 치는 칭찬도 막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이들 성적이나 결과물을 칭찬해줄 때보다 내 진심이 담뿍 담긴 이런 칭찬을 이야기할 때면 괜히 나도 낯이 뜨겁고 부끄러워진다.
스승의 날이 지난 다음 주. 오늘도 칭찬할 거리를 찾았다.
점심 시간에 학교 안을 어슬렁거리다 만난 해준이가 그랬다.
"선생님~ 누가 우유를 쳐서 우유가 다 터졌어요. 저랑 은정이랑 해진이, 진원이가 다 닦았는데 아직 냄새가 나요."
"어머 정말? 알겠다. 고마워~"
"네~"
나중에 은정이에게 더 자세히 들은 바로는 5학년 복도에서 6학년 누군가가 우유를 주먹으로 쳤고,(대체 왜 그랬을까..? 힘 자랑..?) 우유팩이 터져서 내용물이 다 흘렀고, 그래서 아이들이 휴지로 닦았다는 것이었다. 은정이가 덧붙였다.
"선생님 근데 저랑 몇 명이 그거 하고 있으니까 다른 애들도 다 갑자기 저희 쪽으로 오는 거예요. 근데 다 도와줬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그러고 오늘 퇴근을 하는데 복도에서 발견한 안내문.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린 부분은 우유를 치운 우리 반 네 명의 이름이다. 우유를 닦긴 했지만 복도가 미끄러워 아이들이 뛰면 다칠까봐 염려했던 거겠지. 그래놓고도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뿌듯함보다, 내가 하니까 다른 아이들이 와서 이유 없이 도와주더라는 것,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는 그 마음이 앞서는 아이들을 어떻게 칭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바로 문화를 선도하는 힘이고, 선햔 영향력이고, 누군가의 본이라는 걸 이 아이들은 알까?
아마 모르겠지. 그래서 내일이 되면 아주 낱낱이, 모두가 있는 곳에서,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부끄럽게 칭찬해 줄 작정이다. 그래서 아이들 마음 속에서 뻐근하게 올라오는 찐한 뿌듯함을 안겨 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