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와 톱니바퀴, 그리고 현대인에 대하여
앞선 글에서 현재가 500년 뒤의 미래라 가정하고 500년 전의 노예 생활을 소개했다. 독자 중 일부는 그저 500년 전의 노예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일부는 현재 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읽었을 수도 있다. 난 그 글을 꿈과 행복 그리고 자유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을 노예에 빗대어 단어만 바꿔 쓴 것이다. 노예라는 꽤 자극적인 비유로 불쾌감을 느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사회의 대부분은 근로 소득을 취하는 근로자다. ‘내가 노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며 나를 욕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 라며 조롱했을 수도 있다. 취업한 덕분에 꿈을 이루어내서 행복하게 일을 하고 여유와 낭만,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자신의 행복의 기준을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자존심과 입술은 노예가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 속의 순수한 내면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톱니바퀴는 내가 노예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다. 대학교 때 꿈 없이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너 톱니바퀴가 되고 말걸?’이라 말하며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다. 공장에서 원하는 규격대로 제품의 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톱니바퀴. 굴러가는 동안은 잘 굴러갈 수 있게 닦아주고, 윤활유도 잘 발라 준다. 톱니바퀴는 그러한 사장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아껴주는구나 오해한다. 사실은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녹슬고 고장 나면 톱니바퀴는 버려진다.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의 귀한 인생이 이용당했단 사실을, 그리고 다른 톱니바퀴들 한테 도망가라고 얘기하지만, 윤활유를 맞으며 씽씽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순수한 철은 이를 듣지 않는다. 자격증을 따고, 높은 외국어 점수를 받고, 기업이 좋아하는 대외활동을 하는 등 대학생들은(혹은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행복을 깎아가며 회사가 원하는 규격의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용당하는 걸 애써 부정하면서 말이다. 오해할까 봐 강조하는 것이지만 자격증, 외국어, 대외활동 등이 나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의 꿈, 행복과 자유와 상관없이 하는 의미 없는 노예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서류 더미, 상사의 질책, 박탈감과 자유롭지 못한 감정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 그 속에서 편하게 이득을 취하는 누군가. 자유와 행복을 포기하고 누가 더 많이 포기하고 노동에 충성을 했는가를 비교하는 현재를 보면서 노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현대인을 노예로 비유하며 자유와 행복에 대한 글을 쓰던 나는 충격적인 말을 알게 되었다.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를...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 리로이 존스
신기하게도 내가 쓴 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본질적인 내용은 완벽히 같지 않을 수 있으나, 의미가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휴가, 야근, 출퇴근의 시간, 포기하는 가족과의 시간, 사랑, 업무의 강도, 책임의 정도, 취미와 꿈의 포기, 건강, 자존심 등 자신에게 묶여있는 족쇄와 쇠사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서로 비교를 한다. 누가 더 그나마 괜찮은 쇠사슬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상대적으로 괜찮은 족쇄와 쇠사슬을 가진 사람들은 자랑하기 시작한다(정도가 심한 조직은 ‘누가 더 포기를 많이 했는가’를 열정의 척도로 사용하는 사이코패스적인 경향까지 보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하다 결국 자신도 그 쇠사슬과 족쇄를 주인님으로부터 얻기 위해 말을 더 잘 듣기로 한다. 그러다 취업을 하지 않고 자신이 꿈꾸던 사업을 하는 사람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웃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