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중략)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2014, 민음사)> 中에서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면 수많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원자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총체다. 원자의 내부는 핵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0.01%의 핵과 99.99%의 빈 공간이 만들어내는 원자는 ‘빈약함’으로 세상을 구성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허무의 토대 위에 세워진 존재는 한없이 초라하고, 하찮으며, 보잘것없는 우주의 미물이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이 자리를 감싸지만, 이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논리며 자연이 정해준 이치다.
그렇다고 중요한 것들을 내치자는 건 아니다. 책의 저자는 바로 그 하찮음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허무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삶의 본질과 의미가 담겨있다고,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로써 과연 우리는 나아가 우리의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암담한 현실 속 할 수 있는 건 가벼운 웃음
대상을 사랑하려면 우선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한국인의 삶은 매 순간 고단의 연속이다. 입시 문턱은 높고, 교육 바람은 드세다. 유혹 많은 청소년기를 지나 교복을 벗어던지면 낭만도 잠시 취업난이 도사리고 있다. 매년 최고치를 기록하는 실업률은 마땅한 대안이 없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연애는 꿈도 못 꾼다. 결혼을 하려면 대출은 필수다. 각종 지원금을 약속받지만 출산과 육아 계획은 계속해서 움츠러진다. 부동산 역시 좀처럼 잡아지질 않는다. 월급의 반 이상이 고스란히 세로 나간다.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정년을 채우지만, 100세 시대에 제2의 직장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힘든 세상이다. 비단 한 개인의 삶이 아닌, 사회 전반에 문제가 드러난다. 단기간에 고성장을 이뤘으나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한 탓이다. 동시에 많은 것을 잃었다. 국가의 리더는 줄줄이 철창에 갇히고 4년 전엔 수백 명의 아이들도 잃었다. 이념에 갇혀 국민을 보지 않으니 경제는 악순환에 빠진다.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삐걱댄다.
이처럼 생의 의지를 꺾는 현생을 어찌 사랑할 수 있을까. 책에 나오는 네 주인공 알랭, 칼리방, 샤를, 라몽은 암 말기 판정, 지인의 죽음, 생활고 등에 대해 관조적이다 못해 다소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이들은 한데 모여 무거운 주제에 대해 허무하고 들어 봤자 전혀 쓸모없는 농담과 이야깃거리를 덧붙여 말한다. 작가는 이들이 웃으며 주고받는 농담과 얼토당토않는 영웅담을 길게 늘여 책의 상당량을 차지하게 놔둔다. 마치 그것이 주인공들이 본래 하려던 말인 것처럼 말이다.
극복의 힘은 보잘것없는 것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삶이 진정성 있는 무게들로 가득 차기를 바라지만 삶은 정작 그 반대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지치고 힘들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극복의 힘은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유머와 위트에 있다. 웃음이 만병치료약이라는 말도 있다. ‘가벼움’, ‘농담’, ‘웃음’, ‘망각’, ‘냉소’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삶의 위안이 되고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 ‘하찮은’ 진리는 어쩌면 삶의 본질과 맞닿아있다. 농담과 거짓말,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삶은 빛난다.
그래서 작가는 책의 제목을 ‘무의미의 축제’라고 지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무의미한 것들일 수도 있겠다. 하찮고 의미 없는 것들의 축제, 삶은 그런 것이다. 원자를 구성하기 위해서 극소량의 핵도 중요하지만 99.99%의 빈 공간이 있어야 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