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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Aug 24. 2021

배고픈 하루

2018. 10. 23. 둘째 날

 피곤했던 탓인지, 아침 10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첫 관광지가 궁금했는데 핸드폰 수리점부터 가야 한단다. 희재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설치를 위해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수리점으로 갔다. 수리점은 허름한 슬래브 건물 3층인 데다가 간판도 없어서 초행자는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은 50대쯤 되어 보이는 약간 마른 듯한 한국인 남성이었고 다른 종업원은 보이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한참이 흘러도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기술자를 불렀다. 곧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와서 작업을 도와주었다. 뉴욕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인터넷 설치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희재와 기술자가 핸드폰과 씨름을 하는 동안 심심해진 나는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얘기 중에 그는 자신이 흥사단 단원이라고 했다. 평소 흥사단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무언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 종이와 펜이 보여서 캘리그래피로 덕담을 써 주고자 사무실 한쪽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젊은 여자가 들어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자리를 비키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15평 정도 되는 사무실 전체가 핸드폰 수리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앉아있던 책상은 그 사람 자리였던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니 그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임대인은 모두 3명인 듯했다)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것을 보니 그간의 고달픈 삶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몸에 밴 것 같았다. 필요에 의해 같은 공간을 나눠 쓸지언정, 마음을 나눌 여유는 없는 것이다. 본인 자리에 앉고 나서도 쉽게 펴지지 않는 그 여인의 미간을 보며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희재 핸드폰에 인터넷을 설치하고 나니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빌딩 화장실은 외부인에게 개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숙소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공공 화장실이 많은 한국에서는 화장실을 아무리 많이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뉴욕에는 화장실이 별로 없어 보여서 나 때문에 희재가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


 뉴욕 관광 명소의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과 성인 오락장의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간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국의 유명 배우, 운동선수, 트럼프 대통령 같은 유명 인사를 감쪽같이 닮은 밀랍 인형이 세워져 있길래 같이 사진도 찍었다.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있는 한국인 관광 회사에서 시내 관광버스, 엠파이어 빌딩, 자유의 여신상 등 유명 관광지 일곱 군데의 입장권을 구매하고 밖으로 나오니 오후 3시가 지나 있었다.



 아침을 거의 못 먹는 체질이라 점심을 12시 전후로 먹어야 하는데 3시가 지나니 무척 힘들었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자고 했더니, 희재는 조금만 더 가면 있는 유명한 햄버거 가게로 가자고 했다. 배도 고프고 힘들어서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희재를 따라 식당에 도착하니 어느새 4시였다.


 가게는 번듯한 건물이 아닌 1층짜리 작은 노천 식당으로, 동네 공원에 있는 간이매점 같은 분위기였다. 손님들은 햄버거를 사서 가게 바로 앞 넓은 공터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겨울에는 춥겠노라고 하니, 이 야외 음식점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겨울에는 장사를 안 한다고 한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음료가 담긴 종이 박스를 들고 온 희재는 감격에 겨워 보였다. 외롭고 힘들 때 가끔 들러서 별식으로 마음을 달래며 힘을 얻은 장소랬다. 한 입 크게 베어 물더니 늙어서 그런지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는다며 슬퍼했지만 나는 맛있게 잘 먹었다.


 허기가 채워지자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종업원에게 가서 위치를 물었더니, '당신이 이쪽으로 해서… 저쪽으로… 가면 공중화장실을 발견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온몸을 사용하며 시적(詩的)인 언어로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줘서 고마웠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열심히 걸어가던 도중, 10층 정도 되어 보이는 큰 빌딩을 발견했다. 그곳 화장실이 더 쾌적할 것 같아서 문 앞의 덩치 큰 문지기에게 화장실을 사용해도 되는지 조심스레 물었으나 단박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원칙에 철저하고 의외로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것 같다.


 빌딩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유료로 운영하는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문이 잠겨 있길래 동전을 넣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크게 당황하여 희재에게 돌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알고 보니 화장실 이용 방법이 매우 복잡했다.


 1. 화장실이 사용 중일 때는 문이 닫히고 입구에 빨간색 불이 들어온다. 이때 돈을 넣으면 기계가 먹는다.

 2. 화장실을 사용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면, 잠시 후 문이 다시 닫히고 자동으로 내부 물청소를 한다. 이때도 빨간색 불이 들어오고, 마찬가지로 돈을 넣으면 기계가 먹어버린다.

 3. 물청소가 끝나면 입구에 파란색 불이 켜진다. 이때 동전을 넣어야 문이 열리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아니, 그러면 빨간불이 켜진 동안에는 돈 통을 잠가놔야 하는 것 아닌가? 아까운 동전을 2개나 먹어버린 기계가 야속하고 속이 쓰렸다.


 늦은 점심을 먹은 우리는 10여 년 전에 희재가 공부했던 학교로 향했다. 이곳도 방문객의 신분을 엄격히 확인하고 있었다. 희재는 재학 당시의 학생증을 보여주며 나를 아빠라고 소개했고 다행히도 별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학교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돌기둥의 우람한 정문, 싱그러운 잔디가 깔린 넓은 교정, 아카데믹하고 낭만적인 건물을 연상했는데, 그냥 시내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미술 학원 같아 보였다. 그런데도 전 세계 각지에서 많은 학생이 공부하러 오는 이유는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디자인 전문 교육 기관으로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많이 배출했고 좋은 회사에 취업도 잘 되기 때문일 것이다.


 1층은 로비 겸 전시회장이었고 6개의 층은 빈틈없이 활용되고 있었다. 1층뿐만 아니라 각 층 여기저기에 학생들의 드로잉, 회화, 일러스트, 사진 등의 작품이 게시되어 있어 미술 학교다운 모습이었다. 상당히 우수한 작품도 여럿 보였다. 정규 수업이 끝난 시간이었는지 둘러보는 동안 학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희재는 강의실과 실기실을 둘러보며 옛 추억에 잠겨 의자에 앉아보기도 하고, 사방을 찬찬히 살펴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희재를 쫓아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학교 방문을 끝내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중고 옷과 골동품을 파는 상점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내 눈에 그리 매력적인 물건은 없었지만 희재는 신이 나 보여서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지하철을 타러 역으로 들어오니 여기저기서 공연을 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중 두 남자 성악가의 이중창을 잠시 서서 감상했다. 둘 다 노래를 정말 잘했다. 지하철역에서 이런 공연을 한다는 것이 생소했지만 삭막한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여행 내내 사용할 지하철 표를 사러 갔는데, 기계에 중국어, 일본어와 더불어 한국어도 표기되어 있어서 승차권 구매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공항에 이어 지하철역에서도 우리나라의 국력이 크게 뻗어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희재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모든 순간을 기록했다. 희재는 사진을 정말 많이 찍는다. 긴 하루를 보내고 방으로 돌아와서 쉬는 것도 잠시, 희재는 구시렁거리면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희재의 양손에는 검은색 봉지 2개가 들려져 있었다. 내가 아침을 안 먹는다고 하고선 먹고, 미국에는 국이 없는데 자꾸 뜨거운 국을 찾으니 날 위해 한인 마트까지 다녀온 것이다. 봉지 안에는 간단한 음식과 함께 된장국 분말 봉투 여러 개와 국을 담아 다닐 수 있는 작은 보온병이 들어있었다.


 본의 아니게 딸을 힘들게 하는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나도 내가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이었는 줄을 진작 알았더라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왔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습관인데, 여행지에서 딸에게 짐이  줄이야..


 그것도 그런데, 이렇게 밥을 잘 안 챙겨 먹다니! 나는 제때 밥을 먹지 못하면 컨디션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다. 하지만 희재가 열심히 준비한 여행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아무리 힘들어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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