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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Aug 05. 2020

이 우울감은 비 때문일까?

2020. 08. 05. 비

퇴근 후 기분이 날씨처럼 우중충해서 집 앞 웨스턴 바에 들어왔다.


"늘 먹던 걸로."


는 얼어 죽을,


"혼자 오셨어요?"


라는 종업원의 물음에 '아, 예..'라고 답하며 쭈뼛쭈뼛 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메뉴판 여기 있습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성실하게 읽어봐도 역시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준벅이 멜론맛이라는 것 정도..?


눈 앞에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추억 속 그 액체의 맛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저기 뭐랄까.. 독한데 달지 않고.. 술통을 통째로 훈연한 듯한 그런.. 바비큐 같은 것이 나는 칵테일을 전에 먹었거든요. 그걸 또 먹고 싶어서요."


"혹시 색깔 기억나세요?"


"갈색이었던 것 같아요."


"네, 만들어 드릴게요."


.

.

.


"어떠세요?"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해요. 이것도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예전에 오셨었나요?"


"네. 반년쯤 됐어요. 그때는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곳에도 손님이 올 지 고민이라고 하셨는데 그 뒤로는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가끔 와도 자리가 없더라고요."


"아! 기억나는 것 같아요. 재밌네요. 오늘은 제가 여기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거든요. 앞으로는 이 친구가 저 대신 사장님을 도울 겁니다."


"아.. 아쉽네요. 더 자주 올걸."


"오늘이라도 봬서 다행이에요. 케이크 좋아하세요?"


얼굴의 모든 털을 밀어버려서 한껏 말쑥해진 친절한 바텐더는(그는 자칭 털갈이를 했다고 했다) 짙은 갈색의 초콜릿 케이크를 크게 한 덩이 썰어서 가져다주었다. 나와는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앉은 신사분이자 단골손님이 그마지막 날을 기념하여 사 왔다고 했다.


"슈가파우더가 없어서 민트만 올렸어요."


섬세하시기도 하지. 기다란 포크로 삼각 코 부분을 썰어서 혀 위에 얹으니, 내일모레 퇴사하는 후배와 낮에 나눈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요즘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 걱정입니다. 퇴사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고맙다. 신경 써 줘서."


발톱 끄트머리부터 정수리까지, 전신을 우비처럼 감싸는 짙은 우울은 계속되는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비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내게 필요했던 것은 공감과 소통, 오직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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