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재 Sep 08. 2021

MoMA와 현대미술, 그리고 스테이크

2018. 10. 25. 넷째 날

 MoMA(The Museum of Modern Art)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내 눈으로 직접 그곳의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평생에 뉴욕 땅을 밟을 일이 없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돌발 상황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이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근·현대의 일러스트, 사진, 디자인, 건축 등 15만 점이 넘는 작품과 30여만 권의 책이 소장된 뉴욕 최대의 현대 미술관이자 복합 문화 공간이다. 뉴욕에 와서 방문하는 첫 미술관이라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됐다.


 숙면을  나에 비해 새벽까지 일정을 짜고 여행 계획을 수정하느라 잠을 거의   희재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MoMA 나만 관람할 예정이라  자게 하고 싶었지만 혼자 길을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쩔  없이 희재는 나를 미술관 앞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부족한 잠을  자기로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는 내가 희재를 데리고 다녔는데, 처지가 바뀐 듯한 지금의 상황이 어색하기도 했다. 희재는 관람이 끝나면 미술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라면서 20불짜리 6개를 줬다.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희재와 헤어졌다.


 입구에서 만난 해설자는 조각을 전공한 30대 중반의 한국 남성이었다. 뉴욕에서 미술가이자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부업으로 미술관 투어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나 말고도 같이 설명을 들으러 온 여자 손님 2명이 더 있었다. 해설자는 고흐, 고갱, 세잔, 샤갈, 피카소 등 근대 작가를 비롯하여 현대 모더니즘 작가에 이르기까지의 작품 경향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다. 실제 원화를 보면서 해설을 들으니 큰 흐름과 특징이 머릿속에 잘 정리됐다.


 화집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유명 작가들의 그림을 실제로  것은 처음이다. 인쇄물에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부드러운 색감과 커다란 규모의 작품들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넓은  3개를 차지할 정도로  모네의 '수련' 연작 앞에서는 쉽게 발을   없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색을 희롱하듯 붓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활달한 필치를 통해 대가의 면모를 느낄  있었다. 그밖에 루소, 프리다 칼로, 마티스, 앤디 워홀, 달리  내로라하는 모더니즘 작가들의 그림을 눈앞에 두고 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없었다.


모네의 수련과 함께


 그중에서도 고흐, 고갱, 세잔의 작품을 본 순간, 마치 오랫동안 못 본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라 친숙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들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학생들에게 자주 설명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들 세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19세기 후기 인상파 작가들로, 내가 보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부친이 지성을 갖춘 당대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고흐는 목사 아버지를, 고갱은 신문 기자 아버지를, 세잔은 은행가 아버지를 두었다. 둘째, 원래 다른 일을 하다가 화가로 전향했다. 화가가 되기 전에 고흐는 전도사 일을 했고, 고갱은 선원을 거쳐 증권거래소에서 일했으며, 세잔은 은행원이었다. 셋째, 모두가 고달픈 삶을 살았다.


 그중 가장 불행한 화가는 고흐였다. 나와 고흐가 닮은 점은 연애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명의 운명적 사랑을 만나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있게 되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고흐는 젊었을  짝사랑했던 여인 서너 명에게 프러포즈를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자화상을 통해  그의 얼굴은 다소 무섭고 까칠해 보이는데, 이러한 비호감의 인상과 괴팍한 성미 탓일 수도 있겠다.


 그는 임신한 매춘부와 살았고, 성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말년에는 심신이 피폐해져서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37살이 되던 ,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나마 그가 그림을 그릴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고흐가 죽기 2 전쯤부터, 그는 마치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다. 900 점의 페인팅 작품과 1,000점가량의 드로잉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고갱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갖은 고생을 했다. 3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화가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생계가 어려워져서 가족들과 한동안 떨어져 살았다.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서 두 달 정도 고흐와 함께 살면서 같이 그림을 그린 적이 있으며, 말년에는 타히티섬과 파리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심한 영양실조와 우울증, 성병으로 고생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부유한 은행가 아버지를  세잔은 고흐나 고갱보다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본인이 사생아라는 데서 오는 자괴감과 화가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는 아버지로 인해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냈다. 결국, 20 초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꿈을 향해 나아갔지만, 당시의 대표적인 화가 등용문인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 계속 낙선하며 크게 좌절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882년에 이르러 그의 작품은 간신히 관전(官展) 입선하게 되고 약간의 자존심을 회복할  있었다. 20 동안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그의 집념이 대단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설가 에밀 졸라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고 결별하여 외롭게 지냈다.


 이후 56세가 되던 해에 처음  개인전으로 드디어 인정받기 시작해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70  원의 재산 덕분에 줄곧 그림에만 몰두할  있었던 것은 다행이지만, 뿌리 깊은 열등감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살아생전 성공한 작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상업적으로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순수하고 맑은 예술혼이 낳은 작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현대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시원섭섭한 일이다.


 세 명 모두 후기 인상파 작가들로, 초기에는 불행한 환경 탓인지 작품이 대체로 어둡고 침울하다가 후반기에 들어 밝은 톤의 색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고흐의 경우, 초반에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과 같이 우울한 분위기의 그림을 주로 그렸고 후반기에는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동양화처럼 선을 살려 물결치는 듯한 독특한 터치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 밭'이 대표적이다. 그의 이러한 격정적인 붓 터치는 후에 표현주의(Expressionism)에 영향을 끼쳤다.


Van Gogh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밭> 1889


 고갱은 서른 중반까지 증권 거래인으로 일하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후에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전업 작가라는 배고픈 길을 택했지만, 주변에서는 계속 아마추어 취급을 한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고갱은 평평한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는 일반적인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조각이나 판화, 도자기도 만들었지만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문명 세계에 대한 회의를 느껴 남태평양 타히티섬의 '마타이에아' 가서 원주민들의 건강한 모습과 원시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화판에 옮겨 담았다. 형태를 억지로 꾸미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기존의 화가들이 사용하던 그림 기법인 음영법, 농담법, 투시 원근법을 초월하여 순수한 색채 표현에 힘썼는데, 이는 그가 남들이 평생 걸려 하는 그림 공부를 10  만에 해냈기에 가능했던  같다.


 강렬한 보색 대비, 굵은 선과 심플한 형태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세계는 이후 야수파에 영향을 미쳤다. '황색의 그리스도', '아베 마리아', '언제 결혼하니?',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등의 대작에서 그러한 면모를 살필  있다.


Paul Gauguin <아베마리아> 1891,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보헤미안의 기질이 다분하여 타히티와 히바오아섬까지 가서 그림을 그리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한 고갱이었지만 다소 정적인 문학의 세계에도 그는 영향을 미쳤다. 타히티에 머무르는 동안 겪은 경험과 생각을 직접 기록한 '노아 노아'라는 책을 발간한 것이 그것인데, 책에는 그의 탈문명을 향한 열정과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또한, 그가 죽은 뒤에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인 '서머셋 '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출간하였고, 이로 인해 고갱의 삶과 작품이 재조명되었다. 살아생전 훌륭한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이 자신을 여전히 비전문가 취급한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가 무덤에서나마 한을 풀었기를 바란다.


 세잔의 초기 그림은 대부분 침울하고 어둡다. 본인이 사생아라는 사실에서 오는 자괴감도 하나의 이유일 테고, 파리 살롱전에서 계속 낙선한 것도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시기가 세잔의 암흑기(1860-1870) 해당한다. 하지만 이때 그는 오히려 겸손하게 실력을 쌓아나갔던  같다. 하나의 유파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장르를 두루 섭렵하면서 인상주의 시기(1870-1878)까지 계속 그림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관전에 입선하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예전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때가 그의 성숙기(1878-1890) St. 빅투아르산 등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다. 이후 유산도 물려받고, 개인전의 성공으로 그림에 자신감도 붙으면서 그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말기(1890-1906)에는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 '사과가 있는 정물', '목욕하는 사람' 등의 많은 대표작을 탄생시켰다.


 세잔은 당시 화가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평범한 '사과'라는 소재로 훌륭한 정물화를 그려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형태와 색채를 단순화시킨 것은 물론, 소실점을 이용한 전통적인 투시 원근법이 아닌 여러 시점으로 명암의 교차에 몰입하여 그린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다시점(多視點) 기법과 함께 '모든 물체는 원기둥, 원뿔, 공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그의 이론은 그다음 세대인 브라크와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Paul Cézanne <Orgy> 1864,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인상파의 그림을 모아놓은 곳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우리는 현대 미술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입체물을 펼친 전개도 같은 그림을 그린 브라크와 피카소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마주한 순간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것은 작품을 보고 놀라거나 감정이 이입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작을 일흔의 나이에 직접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 때문인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고, 거친  터치 때문인지 언뜻 보면 미완성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림이 미술사에  획을 그을  있었던 것은 현란한 손기술 덕택이 아니라 큐비즘(입체파)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면,  아래에 있는 과일을 바라보는 시점과 여인들의 얼굴을 보는 시점이 각각 다르고, 여인들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단일 시점이 아닌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려졌다. 또한, 여인들의 모습은  형태가 기하학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어 기존의 인물화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피카소의 이러한 표현 기법은, 형태와 색채를 단순화하고 여러 시점을 활용한 세잔의 작품과 더불어 원근법과 명암법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서양 미술에서 피카소 등장(1907년) 이전의 회화가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2차원의 캔버스에 3차원의 대상을 최대한 똑같이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피카소는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캔버스에 평면으로 해체하여 늘어놓는 시도를 통해 그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당시의 미술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으며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피카소의 초기 그림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모방했다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다양한 것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한 후 탁월한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피카소는 마침내 인정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잭슨 폴록을 비롯한 당대 화가들이 '피카소가 다 해 먹어서 할 게 없다'라고 푸념할 정도로 다채로운 각양각색의 시도를 통해서 작품 세계를 펼쳐 나갔다.


 피카소 이후 여러 화가가 화판 위에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갔으나 종국에 가서는   흰색 캔버스만 남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현대 미술에서 회화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후 현대미술은 설치와 영상 작업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Georges Braque  <기타를 든 남자> 1911, Pablo Picasso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우리 일행은 해설자를 따라다니며 파울 클레, 칸딘스키, 샤갈, 루소, 마티스, 잭슨 폴록, 앤디 워홀  여러 현대 화가들의 작품과 설치미술, 사진, 디자인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을 끝으로 투어를 마쳤다.


 나는 배도 별로  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호텔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택시 기사와 원활하게 소통하려면 아무래도 주소가 필요할  같았다.

 

 해설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호텔의 주소를 종이에 받아 적고, 길이 어긋날까  해설자의 핸드폰을 빌려서 희재한테 여러  전화했지만  받질 않았다. 다시 만나기로  시간이  때까지 입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희재는  기미가 없었다. 아마도 깊게 잠이  모양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밥이나 먹을까 싶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2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깔끔했다.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고로케 같이 생긴 음식이 맛있어 보여서 주문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희재를 포함한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고 나서 음식을 주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건 아무리 신중히 고민하고 선택해도 답을 맞힐 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더니, 희재는 없고 '늦잠 자서    분에 아빠를 데리러 미술관으로 간다' 말이 적힌 메모지만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호텔 로비 전화기를 빌려서 희재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괜찮은데 희재는 많이 놀란 듯했다.


 호텔에서 극적인 재회를 한 리는   피곤했는지 낮인데도 불구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희재의 핸드폰 알람 소리가 울려 눈을 뜨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우버 택시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갔다.


 희재가 나를 데려간 곳은 브루클린에 있는 100 넘은 스테이크 전문 식당이었다. 기역 모양의 레스토랑은 그리 크거나 화려하진 않았지만, 벽돌과 나무로 멋스럽게 꾸며져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있었다. 이미 식사 중인 손님들은 모두 양정장을 하고 있어서인지 품위와 여유가 느껴졌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서빙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뉴욕에서는 즐겁게 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종업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중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에 접시를 갖다주길래, 내가 콧수염이 멋있다고 하니까 고마워하면서 희재 보고 예쁘다고 했다. 한국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예쁘다고 하면 자칫 성희롱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미국에서는 예쁘다,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의 의미로 아끼지 않고 잘하는 것 같다.



 잠시 후, 큰 접시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스테이크가 나왔다. 접시가 따듯해서 식사하는 동안 고기가 식지 않아 좋았다. 달큼한 와인도 한잔 곁들여 기분 좋게 먹고 마시면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던 중, 희재가 어렸을 때 나 때문에 서운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비는 잊고 살았던 순간을 딸의 기억으로 다시 꺼내 들으면서 가끔은 놀라기도 했고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바로 ‘생일 선물 사건’이다.


 생일 아침에 9살 희재가 작은 선물과 함께 축하 카드를 가져왔다. 나는 출근 준비에 바빴을 것이고, 원체 선물 같은 것을 반기는 편이 아닌지라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하게’ 반응했다는 희재 말이 맞을 것이다. 희재는 서운한 티를 내며 한 마디 툭 던졌고, 나는 버릇없이 말하는 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어린 희재는 몹시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20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이 밖에도 가끔 튀어나오는 이해 못 할 언행으로 사랑하는 딸이 종종 정신적인 혼돈에 빠졌고 정서적으로도 흔들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해 줘서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미안했다. 용렬스러운 아비 때문에 심적으로 힘들어했을 희재를 생각하니 마음이 참담해서 속으로 울었다.


 돌이켜 보면 예기치 못한 말과 행동이 쑥 나오는 괴팍한 성격 때문에 가족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오해나 비난을 때때로 사곤 했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그것은 중국의 작가 ‘루쉰’이 쓴 소설의 주인공 ‘아큐’라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선친 탓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에 자주 체하곤 했고, 고교 시절에는 머리에 원형 탈모가 생겨서 ‘땜통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가슴이 계속 뜨끔뜨끔하고 종종 혈변도 보았지만, 당시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감히 아프다는 말을  밖으로 내지 못했다.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모든  스트레스 때문인  같았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적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나의 콤플렉스이자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 영양실조 때문인지 눈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어금니 한쪽이 부스러진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체적인 아픔보다도 더욱 힘들었던 것은, 무능한 가장 탓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미래와 좌절감이었다.


 캄캄한 현실 속에서 계속 옥죄어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신을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무시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생명이 시작된 생일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고, 오히려 남들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나는 천륜이 맺어준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이유로 희재가 어렸을 때 선물한 생일 선물과 카드에 큰 감흥이 없었을뿐더러 도리어 예민하게 반응했나 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열심히 살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고 점차 형편이 나아지면서 몸과 마음도 건강해졌지만, 딸에게 입힌 상처는 돌이킬 수 없기에 한없이 못난 아비가 된 것 같았다. 진심을 담아서 미안하다고 하니, 희재는 다 이해한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오늘 저녁은 희재와 내가 모처럼 진솔하게 소통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먹은 스테이크는 그동안 뉴욕에 와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고기가 조금 남아서 포장을 해 달라고 했더니 꼼꼼하게 잘 싸주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가는 것이 생소했지만 미국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 근검절약하고 검소한 삶을 추구하는 청교도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원래 스테이크는 싸구려 음식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값이 나갈 것을 예상했지만 무려 20만 원이나 나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게다가 희재는 음식값의 30%나 되는 거금을 서빙해준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렇게 많이 줄 필요가 있냐고 물으니 서비스가 마음에 들면 그 정도는 줘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팁 문화가 없어서 사람들이 박하게 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우리로 인해 종업원 할아버지가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라고 했다. 희재 말을 들으니 여유와 상황이 된다면 팁을 넉넉하게 주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잠시 후, 레스토랑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우리에게 아까 그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글쎄, 희재가 의자에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을 놓고 나왔던 것이다. 이대로 가방을 놓고 숙소로 돌아가 버렸으면 앞으로의 여행이 매우 고달파질 뻔했다. 나랑 희재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팁을 조금 줬으면 가방을 갖다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희재는 나를 설마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산책 삼아서 예전에 희재가 살던 집에 가보았다. 지은 지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양옆이 다른 집으로 막힌 것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빌라랑 비슷해 보였다. 희재는 추억에 젖은 듯 문 앞에서 사진도 찍고, 예전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한동안 근처를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밤이 깊어 우리는 숙소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희재는 미국의 식사 매너와 팁을 계산하는 요령을 열심히 알려주었다. 점심에 내가 팁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그러는  같았다. 미국은  문화가 정착한 곳이기 때문에, 택시나 식당에서 팁을 주지 않으면 크게 낭패를   . 나는 속으로 문화인답게 팁을   자신은 있으나, 뉴욕에서 혼자 식사하는 은 또 없길 바랬다.


 

이전 04화 내 딸이 예쁘긴 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