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6. 다섯째 날
오늘의 일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뉴욕 여행객들이 한데 모여 그랜드 센트럴 역을 중심으로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사에 참여한다. 두 번째는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맥베스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다. 요즘이 핼러윈 축제 기간이라 연극이 끝난 직후 공연장에서 이어지는 핼러윈 파티에도 참석 예정이라 했다.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깬 탓인지 조금 출출했다. 엊저녁에 식당에서 먹다 남은 스테이크를 큰 봉투에 싸 온 것이 생각이 나서,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먹었다. 먹는 소리에 잠이 살짝 깬 희재가 나에게 '다 먹지 말고 조금 남기라'고 했다. 나는 갈비뼈에 붙어있는 두툼한 살을 희재에게 주려고 마음먹고, 봉지 안에 떨어진 부스러기 같은 살점만 몇 개 집어먹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뿔싸! 그 뼈는 풍성한 살이 붙어있는 갈비뼈가 아닌, 그냥 폼으로 놓여 있던 단단하고 만질만질한 굵은 뼈다귀였다..! 내가 먹은 살점들이 스테이크 고기의 전부였던 것이다. 너무 당황스럽고 미안해서 상황 판단을 잘못한 것에 대해 변명했지만, 희재는 무척 속상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먹을 것에 환장한 아비로 각인되었으나 도통 오해를 풀 길이 없었다. 귀국하면 가장 먼저 딸에게 스테이크를 사 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침을 제대로 못 먹은 희재와 함께 뉴욕 중심부에 있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역으로 향했다. 이 역은 67개의 선로가 지나는, 1년에 약 1억 명이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차역이다. 바로크풍의 성당처럼 지어진 대리석 건물로서 내부 높이가 38m에 달하며 천장에는 폴 세자르가 그린 별자리 그림이 유명하다. 역 가운데에는 네 면이 모두 오팔로 만들어져 금빛으로 반짝이는 시가 210억짜리 시계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큼직 큼직 하면서도 위용스러운 것이, 역시 미국은 미국이다.
약속 장소에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호주 출신 청년 화가와 함께 오늘 같이 다니면서 그림을 그릴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중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예쁜 딸과 캐나다에서 온 중년의 고미술 복원사 엄마, 흰색 양장에 모자까지 우아하게 차려입고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을 데려온 미국인 엄마, 엔지니어 일을 한다는 수다스러운 미국인 남자, 마지막으로 희재와 나 모두 일곱 명이었다. 우리는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 내부를 크로키처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0초 내외로 그리게 하더니, 풍경이 바뀔 때마다 시간을 조금씩 연장해 주었다. 내 스케치를 본 인솔자가 그림이 매우 아름답고 뛰어나다며 감탄하자, 옆에 있던 희재가 나를 동양화가라고 냉큼 소개했다. 그러자 그가 반가워하며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그의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은 서양화로, 다양하고도 실험적인 기법으로 구사한 개성 강한 작품이 많았다. 나도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그림을 몇 개 보여줬더니 동양화를 처음 봐서 신기한 듯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 내에는 비밀의 공간이 있다. 특정 기둥에 대고 작게 말하면 약 30m 정도 떨어진 건너편 벽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 공명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모두가 신기해하며 서로 말소리를 주고받고, 그림도 그렸다. 곧이어 역 바깥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밖으로 다 같이 나가는 동안 인솔자를 잠깐 불렀다. 인솔자가 싹싹하니 성격도 좋고 특히 서양화가라고 해서, 합죽선에 직접 '웃자'라고 쓴 캘리그라피 부채를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부채를 받아들고 펼쳐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Thank you!'를 연발했다.
역 주변에는 뾰족한 지붕의 크라이슬러 빌딩과 뉴욕 도서관 등 유명한 건물이 많아서 그릴 거리가 풍부했다. 옆에서 희재가 부담스럽게 계속 '천재, 천재' 거렸다. 거리의 풍경을 1시간 정도 스케치하는 시간을 가진 후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구성원들과 헤어졌다.
드로잉 행사를 마치고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이며 뉴욕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뉴욕 도서관으로 갔다. 미국은 공공기관이나 공연장, 체육관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들어갈 때 대부분 가방 및 소지품을 검사한다. 이곳 도서관도 마찬가지로 가방 검사를 엄격하게 했다. 주로 총이나 폭탄을 가지고 입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정말 다니기 편하고 안전하다.
뉴욕의 주요 건물은 1,000년 이상 갈 수 있도록 돌로 지어진 것이 많은데, 방금 보았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나 뉴욕 도서관도 이러한 석조건물로 외관과 내부가 모두 훌륭한 예술 작품이었다. 또한, 도서관의 벽과 천장에는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성당처럼 그림이 그려져 있고, 출입문, 창문, 심지어 문고리도 세심하게 디자인되었으며 고전적인 중후한 멋이 있어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성이나 왕궁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는 당대도 그렇지만 후손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구경하는 내내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건물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을 둘러본 우리는 햄버거집에서 배를 채우고, 숙소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맥베스 공연장으로 향했다.
한국의 홍대 앞 주변 거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첼시 마켓 근방에 공연장이 있었다. 공연장은 6층의 우중충한 낡은 건물로, 오래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건물 입구에는 관능적인 복장을 한 늘씬한 여인이 서서 표를 확인하며 입장객에게 플라스틱 가면을 한 개씩 나눠줬다. 이 가면은 헨젤과 그레텔 동화책에 나오는 코가 뾰족한 마녀를 연상시켰고 공연장에서는 반드시 이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면을 받아들고 마치 중세기의 지하 묘소(카타콤) 같은, 음산하고 어두침침한 좁은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빨간 조명을 켠 큰 홀이 나왔다. 오늘 공연은 두 파트로 나뉘어 진다. 1부는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하는 맥베스 연극 공연이고, 2부는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하는 핼러윈 파티이다. 공연과 파티는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나와서 연극을 보는 동안 관람객이 하지 말아야 할 3가지 규칙을 알려주었다. 첫째, 가면을 벗으면 안 된다. 둘째, 말을 하면 안 된다. 셋째, 배우를 만지면 안 된다.
규칙을 숙지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두침침한 공연장에 입장한 우리는 자연스레 200평쯤 되어 보이는 2층의 넓은 홀에 모였다. 홀 한쪽 벽 앞에는 길이가 약 10m 정도 되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앞에는 피처럼 붉은 음료가 든 잔을 손에 든 남녀 여럿이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배우들은 각자 천천히 의미가 담긴듯한 동작을 취하다가 하나둘씩 잔을 내려놓고 홀을 빠져나가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방을 빠져나간 배우들은 하나, 둘 또는 셋이 한 조가 되어 방을 이동하면서 무언극을 펼치는데 관객들은 배우를 따라 같이 이동하면서 이를 관람했다. 한참 보다가 재미없으면 다른 방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면 되고, 힘들면 빈방에서 쉴 수도 있다. 이 공연은 토막극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렇게 관람해도 내용이 이어진다. (이해하기 어렵긴 하지만)
건물 각 층은 초등학교 운동장만큼 넓었고 구조는 층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층에는 크고 작은 방들만 여러 개 있고, 어떤 층에는 코너에만 방이 있고 가운데는 춤출 수 있는 넓은 마루가 마련되어 있으며 어떤 층은 폭격을 맞은 듯 허물어진 벽과 황량한 바닥에서 허연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방과 넓은 바닥 등 건물 전체가 배우들의 공연 무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간혹 이러한 다양한 공간에서 무언극을 하던 배우들이 갑자기 사방에서 튀어나와 홀 중앙에 있는 마루에 모여서 집단 군무를 추기도 했다.
홀 주변에 있는 여러 방의 인테리어는 각각 달랐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부엉이, 매, 독수리 같은 각종 날짐승의 박제로 꾸며진 방, 뱀술을 담가 놓은 듯한 유리병이 주르륵 진열된 방, 오래된 낡은 욕조가 여러 개 놓여있는 방, 링거가 걸려있는 환자용 침대가 빼곡히 놓인 방, 낡은 고서적들이 서가에 빼곡히 채워진 방, 그리고 벽과 천정에 빈틈없이 각종 다양한 접시가 붙어 있는 방 등 방마다 대부분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고 소품은 골동품 상점에나 있을법한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었다.
배우들은 이러한 방들을 넘나들며 난해하고 괴기스러운 무언극 공연을 펼친다. 원래 맥베스 희곡 자체의 분위기가 어둡고 침울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번 주가 핼러윈 축제 기간이라 그것에 맞게 스산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좀 더 과장하여 공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중 한 가지를 소개해 본다.
어두침침한 병실에 얼굴이 창백한 가냘픈 여인이 아픈 듯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다. 대체로 이곳은 조명을 일부러 낮춘 듯 어두침침한데, 이 방은 더욱더 어두운 느낌이 든다. 잠시 후 깡마르고 왠지 사악해 보이는 늙은 여자 간호사가 누워있는 여인에게 가서 잠시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침대 시트로 여인을 둘둘 싸서 어깨 위로 거칠게 둘러메고, 옆방에 있는 욕조로 간다. (욕조가 있는 방은 한쪽 벽이 없어 훤히 잘 보인다) 그러더니, 욕조에 내팽개치듯이 그 여인을 밀어 넣는다. 누드 상태로 욕조에 잠겨 있던 여인이 잠시 후 눈을 뜨더니 자기 손목동맥에서 불현듯 흐르는 피를 보고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자 늙은 간호사가 다시 들어오더니 시트로 여인을 다시 감싸고는 부축해서 어디론가 데리고 나간다.
이러한 괴기스러운 연극이 각 방에서 단편적으로 이어지다가, 밤 10시가 되자 배우와 관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원래 모였던 2층 홀로 하나둘씩 모였다. 관객의 의지로 모인다기보다는, 주최 측에서 동선을 그렇게 의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일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은 처음에 앉았던 테이블에 원래대로 다시 앉았다. 마치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같은 분위기가 연상되었다.
한동안 테이블에 앉아 핏빛 술잔을 들고 무표정하게 무언의 동작을 취하던 배우들이 갑자기 한 사내를 지목하더니, 여럿이서 지목된 배우를 번쩍 들어 천장에서 내려온 밧줄에 그 남자의 목을 매달아 버렸다. 이는 맥베스가 자살한 것을 각색하여 극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그 후 약 1초 동안 정전이 되고, 다시 불이 켜지면서, 배우들은 사라지고 목이 매달린 시체만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 연극은 끝난다. 그리고 다시 0.5초 동안 불이 꺼지고, 다시 켜졌을 때 천장에 매달려있던 시체는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시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됐다. 파티는 1층부터 6층까지 모든 층에서 펼쳐졌는데 다행스럽게도 3층에는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편히 쉴 수 있는 소파와 의자, 테이블이 있고 한쪽에는 각종 술과 음료가 공짜로 무한정 제공되는 Bar도 있었다. 각 층과 구역마다 화려한 복장을 한 가수와 무희가 밴드와 함께 쇼를 펼치고, 관람객은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춤을 추며 파티를 즐겼다. 공연팀은 2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팀으로 교체되는 것 같았다.
6층에는 방이 없는 대신, 귀퉁이에 작은 무대가 있고 중앙에는 매우 넓은 홀이 있었다. 홀의 사방 코너에는 섹시한 복장을 한 20대 젊은 남녀 댄서가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작은 무대에서는 엽기적인 그림자 연극을 하고 있었다. 핼러윈 축제 기간이라 컨셉을 괴기스럽게 잡은 것 같았다. 그림자극이긴 하지만 끔찍했고 내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별로 크지도 멋있지도 않은 무대 오른쪽에서 눈이 부리부리하고 길게 파마머리를 한 키 큰 여자 댄서가 어정쩡한 막춤을 추며 등장한다. 자세히 보니 콧수염이 있는 여장 남자다. 잠시 후 무대 왼쪽에서 가냘프고 아담한 여자 댄서가 나와 잠시 같이 춤을 춘다. 무대 가운데에 작은 의자 2개가 놓이자, 춤을 추던 두 댄서가 서로 마주 보며 의자에 앉는다. 앉는 순간 양쪽으로 커튼이 드리워지고, 두 댄서의 형체는 그림자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둘은 잠시 수다를 떨다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언쟁을 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키 큰 댄서가 둔기로 작은 댄서의 머리를 내리치자 눈에서 눈알이 튀어나온다. 키 큰 댄서가 바닥에 떨어진 눈알을 주워 꿀꺽 먹으면서 공연은 끝이 난다.
파티에 참여한 관객들의 복장은 다양했다. 핼러윈 파티답게 여러 가지 귀신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새까만 옷 위에 해골과 뼈가 하얗게 그려진 옷을 입은 사람, 입체로 만든 닭대가리를 뒤집어쓴 사람, 작은 반짝이 전구를 온몸에 휘감고 신나게 춤추는 반라의 여인, 거룩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분장한 이, 드라큘라로 분장한 남자, 신부 복장을 한 사람 등, 그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맞는 분장을 하고선 이 밤을 즐기고 있었다. 층계가 있는 벽에는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댄서들이 밧줄로 만든 거미줄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의상에 밝은 야광 칠을 해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조금 전 배우들이 공연했던 크고 작은 방에서도 댄서들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춤이라기보다는 퇴폐적인 행위예술에 가까워 보였다. 예를 들어, 붉은색 조명을 켠 작은 방에서 경찰 복장을 한 남성이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누워서 아랫도리를 거의 드러낸 채 다리를 휘젓는 식이었다. 건물 전체가 자극적이고 흥분되는 것들로 가득 찬 광란의 도가니였다.
파티는 새벽 2시쯤 절정을 이루더니 곧이어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관객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도 2시 반쯤 숙소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가면을 벗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나를 본 키 큰 미국 청년이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고는 ‘참으로 멋져요.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나이 70이 넘어서 예쁜 딸과 뉴욕의 초대형 나이트클럽에 춤추러 온 나를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공연장에서 나오니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우버 택시 회사에 희재가 여러 번 전화했는데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고생 끝에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3시 반이었다. 살면서 꽤 많은 일을 겪었으나 오늘 밤의 경험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