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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Oct 11. 2021

딸의 맹활약이 없었더라면

2018. 10. 28. 일곱째 날

 나이아가라 폭포로 출발하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맡겨 두고 캐나다로 가서 1박 2일간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한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짐을 찾아 다른 동네로 이동할 계획이다.


 희재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뉴욕에 오기 전에 호텔로 이메일을 보내서 가방을 맡아 달라는 이야기를 해 두었고, 어제저녁에 안내 데스크에 내려가서 재차 확인까지 했다. 그래서 큰 가방 두 개를 끌고 내려가 맡기려 했더니,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가방 인수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 아닌가! 직급이 제법 높아 보이던 그 직원은 줄곧 자기는 그런 내용을 전달받은 적도 없고, 또 호텔 규정상 체크아웃을 하는 투숙객의 짐을 맡아 줄 수 없다고만 주장했다. 왠지 외지인에게 텃세를 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괘씸했지만, 아쉬운 사람은 우리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희재가 설득에 설득을 해서 종국에는 우리의 짐가방 두 개를 호텔에서 맡아 주기로 했지만, 우리는 그 일로 기분이 많이 상했다. 만약 나 혼자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고, 영어를 잘하는 희재가 믿음직스러웠다.


 호텔 데스크 직원과 입씨름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지체한 우리는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공항까지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그런데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택시비가 무려 8만 원가량 나와서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의 택시비가 비싸긴 비싸다. 


 공항 대기실에서 비행기 탑승 시각이 되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희재 옆에 앉아있던 머리가 하얗게 센 미국 할머니가 오늘 아침 비행기를 놓쳐서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의외의 풍경이었다. 정이 많기로 소문난 우리나라에서도 옆자리의 처음 만난 사람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는 풍경이 많이 사라졌거늘, 하물며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한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희재는 오늘 말고도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퍽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미국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말을 자주 거냐?"

"아, 아빠는 생소하셨을 수도 있었겠다. 네. 원래 자주 걸어요. 지나가다가 이 사람 옷이 마음에 들면, '네 옷 멋지다!'라고 한 마디 하기도 하고. 예전에 뉴욕에 살 때 한창 들고 다니던 가방이 있었거든요? 그 가방만 들고나가면 '그 가방 어디서 샀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꽤 있었어요. 그때 한창 말 걸림(?) 좀 당했지. 저도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는데, 이거에 익숙해지면 또 막상 한국 가서 심심해. 아무도 말 안 걸어서. 아! 그런데 위험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 아무도 안 도와줘요. 그럴 땐 또 완전 남남이야."

"미국 문화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미국 문화라기보단, 뉴욕 문화라고나 할까? 뉴욕에서만 허용되는 그런 거."


 우리 비행기도 출발이 지연될까 봐 우려되었지만, 다행히 탑승 게이트는 제 시각에 열렸다. 그 미국 할머니도 탑승했는지 궁금해서 기내를 둘러보았으나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탑승하셨으리라 믿고 싶었다.


 버펄로 공항에 도착하여 우버 택시를 타고 1시간 정도 만에 캐나다의 국경에 도착했다.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관광객들이 제법 많아 국경 통과 시간이 약간 지체되었다. 드디어 우리가 탄 차가 검문을 받게 되자, 희재는 날카로운 눈을 한 캐나다 경찰의 질문에 침착하면서도 능숙하게 대답했고 덕분에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국경 통과 후 30분 정도 더 갔을 때, 우리는 마침내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 도착했다. 명승지에 가게 되면 으레 관광객을 위한 이런저런 시설물이 설치돼 있어서 자연경관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이곳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에도 호텔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위락 시설들이 많이 들어차 있어서 보기에 별로 좋지 않았다. 인간의 욕심은 어딜 가나 비슷한 것 같다.


 예약해둔 숙소인 메리어트 호텔에 가서 방을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이 숙소는 폭포에서 가까운 우측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제법 큰 호텔로, 방에서 내려다보니 폭포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희재는 나를 위해 특별히 예약한 방이라고 생색(?)을 냈는데, 얼마든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호텔은 폭포에서 약 500M가량 떨어져 있어 창문을 닫아 놓았는데도 폭포수가 내는 굉음이 은은히 들려왔다. 폭포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역시 명불이 허전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잠시 쉰 우리는 저녁 식사도 하고 폭포도 구경할 겸 해서 폭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이슬비가 옆으로 내려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빗방울이 아니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미세한 비말이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데도 여기까지 물방울이 튈 정도니, 나이아가라 폭포의 위력이 대단하다. 관광 한철이 지난 10월 말,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관광객이 폭포 주변에 제법 많이 있었다. 폭포 아래쪽에는 한국에서 효도 관광을 오신 듯한 노인 분들이 보였다. 비슷한 또래끼리 단체로 다니는 것도 재미있어 보이긴 했지만, 가이드를 자처하여 내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선 딸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내심 어깨가 으쓱해졌다.



 폭포 아래 왼쪽에 있는 마을로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바라다보는 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동안 보아 온 폭포는 대개 수직으로 길게 떨어지는 형태가 대부분인데, 이곳 나이아가라 폭포는 옆으로 넓게 펼쳐져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세찬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 웅장한 모습도 장관이지만, 폭포수가 내는 굉음은 세속에 찌들며 켜켜이 쌓아 온 온갖 번뇌를 단번에 송두리째 날려 버릴 듯 우렁찼다.


 자세히 보니 나이아가라 폭포는 위쪽과 아래쪽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위쪽 폭포의 규모가 좀 더 큰데, 그것은 양쪽에 있는 두 개의 폭포가 30도 정도의 각을 이뤄 서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래쪽 폭포는 그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지만, 위에 있는 폭포보다 아기자기하고 운치가 있어서 동양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의 폭포라 그런지 더 마음이 갔다.



 폭포를 등지고 계속 걷다 보니 왼쪽에 마을이 나타났다. 비성수기라 그런지 거리가 썰렁했다. 각종 오락실, 카지노, 공포 체험관, 술집, 레스토랑의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이 몇 없는 관광객을 유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의 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돼지갈비와 야채 죽을 시켜 먹었다. 곁들여 나온 튀김 과자는 입맛에 맞지 않아서 많이 남겼다. 희재는 서빙하던 젊은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넉넉히 주었는데, 음식이 썩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팁 값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과자를 싸 들고, 나이아가라 지역에서만 운행하는 것 같은 ‘We Go’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욕조가 있어서 오랜만에 더운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희재한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뉴욕에서 묵었던 호텔은 숙박비가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샤워실만 있고 욕조가 없어서 불편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몸을 덥히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아 개운하였다.


 내일 할 본격적인 폭포 투어를 위해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동안 장성한 딸과 한 침대를 쓰느라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자서 너무 불편하고 신경도 쓰였는데, 큰 침대에 혼자 누우니 몸도 마음도 편해서 살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서 귓가를 간지럽히는 폭포의 낙차 소리를 듣고 있으니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밉살스러운 호텔 직원에게 한마디   그랬나 싶다가도, 아무 도움도  됐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캐나다 국경을 건널 때도 경찰의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게  것은 딸의 활약 덕분이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폭포를 구경하느라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딸의 뒷모습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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