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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Oct 07. 2021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2018. 10. 27. 여섯째 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기로 한 날이다.


 희재는 다른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다녀와야 했다. 전날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 오전 내내 쉬었음에도 몸 상태가 영 개운치 않았다.


 다소 늦은 점심을 먹고, 그러고서도 한두 시간 이상을 더 쉬었다가 세수만 대충 하고 숙소에서 나와 택시를 이용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술 작품(조각, 회화, 공예 등)들이 전시되어 있으므로 마땅히 ‘갤러리(미술관)’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뮤지엄(박물관)’이라 불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줄여서 그냥 ‘메트(Met)’라고도 한다.


 Met는 내가 미리 상상했던 초현대식 미술관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고대 그리스의 거대한 신전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뉴욕의 주요 건물들 중에는 돌로 지어진 것이 많은데, Met도 건물 자체가 거대한 석조 건축 예술 작품이었다.



 Met는 1870년에 처음 소규모로 개관하였다가 1954년에 이르러 오늘날처럼 대규모의 종합 박물관이 되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용 면에서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유물 및 미술품 330만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으며, 모든 작품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최소한 3일이 걸린다고 하니 그 규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6시경인데도 불구하고 Met 앞에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입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며, 이곳이 과연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Met에서도 예외 없이 가방 및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받아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내 차례가 되어 매표소에 희재가 준비해 준 티켓을 제시하였더니, 스티커 모양의 영수증 겸 입장권을 준다. 그것을 가슴에 붙이고 들어가려는데, 입구 안쪽에 있던 직원이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South Korea.”라고 대답했더니, 한글로 된 안내서(Guide map)을 준다. 그 안내서를 받아 쥔 순간, 우리나라의 국력이 정말 높아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뮤지엄 입구 쪽 1층에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먼저 둘러보았다. 사진으로만 봐 오다가 실제의 작품을 보니, 돌로 만들어졌다는 현상을 뛰어넘는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을 지닌 인체 조각상들 앞에서 내 안의 아주 깊은 곳, 영혼에 공명하는 크나큰 울림소리를 들었다. 십수 세기의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그 작품들을 빚어낸 작가들이 내게 전하는 감동의 크기는 나로서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류 미술사적으로 볼 때 인체의 구상 조각 기법은 그리스‧로마 시대 때 이미 완벽하게 끝났던 게 아니었나 싶었다.


구경하느라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해서, 희재 사진첩에 있던 과거 사진을 대신 첨부한다.

  

 그 옆 전시실에는 중세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거기에서 별 흥미를 못 느낀 나는 그 다음으로 이어져 있는 아프리카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만든 가면이나 인체 목각 상은 어리숙해 보이기는 했으나 묘한 친근감으로 다가왔다. 그 작품들은 실제의 사람보다 3~4배 큰 크기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의 장승이 그러하듯이 한 마을의 수호신으로 만들어진 듯하였다.


 아프리카 전시관이 있는 1층의 뒤편에는 미국 작가, 근대 작가, 현대 작가들의 회화 작품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미국의 현대 작가들 작품에 특히 관심이 많이 갔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관념적인 전통 산수화로, 기운생동(눈에 보이는 형태보다는 내면을 중시하여 정신까지 그림으로 표현하는 동양 최고의 미학 사상)이 중요하다. 선(線)으로 준(皴, 바위나 산의 주름, 즉 산의 계곡이나 바위의 결을 그리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 재밌게 작업 중이지만, 수 세기 전부터 그려진 그림인지라 때로는 내가 너무 과거만 답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 여기서, 고전이 아닌 현대의, 동양이 아닌 서양 화가들의 철학적 사유 탐구를 통해 그러한 고민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갔더니 마침 ‘들라크루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낭만파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인간의 감정과 극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작가이다. 아마도 누구든지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무심히 보았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이 그가 그린 대표작 중 하나다.


Ferdinand Victor Eugène <Commemorates the French Revolution of 1830 (July Revolution)>

 

 특별전이라 그런지 그림의 주제도 다양했고, 작품성은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작품이 수작이었다. 특히 500호 짜리의 큰 그림 앞에서는 그 규모감 앞에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들라크루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붓 터치와 살아있는 듯한 색감은 눈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거장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큰 횡재(?)였다.


 Met 내에는 여러 개의 전시실이 있었고 각 방마다 지킴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관람객이 지나치게 작품 가까이 다가가면 제지하기도 했다. 어떤 전시실 한쪽에서는 그림 앞에 옹기종기 둘러서서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7~8명의 중학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대가들의 원화를 직접 감상하며 공부하는 그들의 교육 여건이 부러웠다.


 어떤 이들은 대가의 미술 작품이나 중세 시대의 갑옷 앞에 이젤과 화판을 떡하니 펼쳐놓고 그것을 모사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자리까지 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박물관 측의 허가를 얻은 듯했다. 이러한 배려는 화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품 관람은 저녁 9시까지   있으며 중간에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관람하고 싶었으나, 전날의 과로와 불규칙한 식사 탓인지 속이 편치 않았고 피곤 기도 몰려왔다. 어쩔  없이 저녁 8시경에 미술관에서 나와서 우버 택시보다 비싼 노란색 일반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차비로 16달러를 주었다. 어째 한국에 살면서 택시를  횟수보다 뉴욕에 와서 택시를 타는 횟수가  많은  같다.   


 숙소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희재가 약간의 먹을거리를 사 와서 그것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했다. 저녁 식사를 방에서 간단히 때운 우리는 내일 출발하게 되는 1박 2일의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위해 짐가방을 정리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있다. 그런데 캐나다 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폭포 전체를 조망하기가 더 좋기 때문에, 희재는 내일 아침 캐나다로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둔 상태이다. 그리고 희재는 우리가 폭포 관광 여행을 하는 1박 2일 동안 우리의 큰 짐가방을 이곳 호텔에 맡기기로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예약을 해두었었다. 이틀밖에 안 되는 짤막한 여행을 위해 큰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이 버겁고 불필요하므로, 꼭 필요한 것만 따로 빼놓고 잠시 이곳에 짐을 맡겼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찾을 계획이다.


 희재는 우리의 짐을 맡기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늦은 밤에 피곤한데도 호텔 로비로 내려가 담당 직원을 만나고 올라왔다. 사소한 실수로 인해 여행에 차질이 생길까 봐 내내 마음 쓰는 희재가 안쓰럽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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