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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r 24. 2020

끝내 놓을 수 없었던

다시, 내일을 살아가는 마음으로


    "오늘도 백혈구 수치가 낮네요."

    내가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띄게 지친 기색을 한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백혈구 수치를 궁금해하던 나는 바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엉거주춤 의사 선생님 옆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도요...? 그럼 루푸스 수치는 괜찮은가요?"

    "네. 괜찮은데... 이상하네. 몸에 반점 같은 건 없어요?"

    "네.. 별로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

    의사는 흐음, 하며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를 기다렸다.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진료실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그 공간에서 이질적인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복막 투석을 시작한 이후로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게 나와서 추가 항목들을 검사하고 있다. 처음엔 루푸스가 다시 활동해서 그런 것 같다고 의심했는데 아직까지 루푸스는 괜찮아 보였다. 그럼 대체 뭘까, 이제는 차라리 루푸스가 활동하길 바래야 하는 건가, 다른 병이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치만 그것도 싫은데. 그렇게 되면 스테로이드를 다시 먹어야 할 테고 그럼 백내장, 골다공증, 문페이스*, 탈모 같은 부작용들도 다시 시작이겠지... 고작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내 생각은 이미 저 멀리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휘젓고 다시 의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수많은 약어들과 숫자들 사이로 향해 있었다. 차트 위로 바삐 움직이는 동공은 내 몸의 이상신호를 알아채기 위해 열심인 듯했다. 나는 물었다.

    "선생님, 만약에 루푸스가 다시 활동하는 거라면요, 왜 그런 걸까요?"

    "음... 그걸 알면 우리가 루푸스를 잡지 않았을까요?"

    "아..."

    짧은 탄식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랬지. 10년이나 앓았는데 아직도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이 녀석의 특징이었다. 상세불명의 전신 홍반성 루푸스. 그게 내 병명이니까. 대체 상세 불명이랄 게 뭐람. 현대의학이 이렇게나 발달했는데도 여전히 제멋대로 나를 끌고 다니는 너란 병...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의사 선생님은 우선 푹 쉬고 잘 먹으라며, 잘 자야 한다고 아주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되짚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들뿐이었다. 십 년 전에도,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10년 간 파악한 나의 루푸스는 큰 시험을 앞두고 있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에 다시 활동한다. 수능을 앞뒀을 때, 그리고 로스쿨 시험을 준비할 때 루푸스는 나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최대의 기량을 발휘해야 할 때 제대로 도전해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백혈구 수치가 낮은 건 왜일까? 집에서 틀어박혀 글만 쓰고 있는 지금. 심지어는 한 달 넘게 글을 멈추었는데도 백혈구 수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작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병과 함께 한지도 1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지나는 느낌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나를 돌보는 데에 힘쓰더라도 루푸스가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열심히 살건 나태하게 살건 나를 돌보며 살건 방치하며 살건 별로 상관없이, 루푸스는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물고 사정없이 뒤흔들다가 내가 도저히 견디지 못할 즈음이 되면 그제야 나를 잠시 놓아주곤 했다. 아니 어쩌면 온갖 약물에 취해 달아나버렸는지도 모르지만. 


    내 몸을 점령한 루푸스라는 포악한 괴물은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싶은 답답한 마음이 들면 나는 언제나 처음 발병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내 몸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때. 그때는 낫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고, 또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터넷이 덜 발달하고 희귀병인 루푸스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을 때*에도 나는 나을 수 있는 단서를 모조리 찾아다녔다. 환우회 카페, 병원에서 하는 강연, 한의원, 외국 논문, 책 등. 그러나 루푸스의 발생 혹은 활성 원인에 대한 말은 거의 전무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루푸스에게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채식을 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서 헬스장과 요가원에 다니고 10시간 이상의 수면 시간을 확보하는 고3을 보냈는데도 루푸스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매 달 돌아오는 외래 진료에 갈 때마다 나는 몹시 긴장했다. 해야 할 일과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면서 몸을 돌보고 있으니까. 그만큼의 성과가 있었으면 하는 기대가 너무나 커서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진료 전에는 항상 엄마와 아빠의 손을 양 손에 잡고 다리를 덜덜 떨었다. 제발, 제발, 이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이번만은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약을 줄일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매 번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속상하다, 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나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모든 걸 포기했는데 대체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아빠의 두터운 손을 잡고 고개를 떨궜다. 3분도 안 되는 진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마다 스테로이드 열두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노려보았다. 짜증도 냈다가, 울기도 했다가, 체념을 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 그렇게 일 년을 넘게 스테로이드를 먹고 나는 점점 부풀어만 갔다. 이렇게나 열심히 하는데도 조금도 낫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이 약들은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일매일 약을 삼켰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서 되지 않는 건 별로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루푸스는 내가 깨부술 수 없는 최종 보스몹인 것 같았다. 나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상대를 보며 점점 무기력해졌다. 매 번 외래 진료 때마다 기대를 품고 다시 도전했지만 나는 항상 탈탈 털렸고 아무리 다시 힘을 내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가고 있었다. 내 병을 위해, 내 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몹시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아프기만 해야 한다는 말과 같을 테니까.



    열아홉 여름 방학 뜬금없이 상장 하나를 받았다. 교육감 표창장 자기 관리 부문 상장. 큰 상이라 입시에 도움이 되어 기쁘면서도 나는 내심 어리둥절했다. 나는 왜 이 상을 받았을까? 몸이 아파서 고3이 된 후로는 점심시간 전에 학교에 간 적이 없는데. 겨우 점심을 먹을 즈음 학교에 도착해서 컨디션이 좋으면 종례까지 있고, 아닌 날에는 밥만 먹고 돌아오기도 했는데. 내가 전교 1등도 아니어서 성적순으로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몸이 아픈 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증표인 걸까?


    사실은 내 몸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내게 자기 관리상이라니, 몹시 괴이했다. 그것은 어쩌면 건강을 돌보지 않고 공부를 택해서 받아낸 상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건강과 바꿔먹은 상장이라는 말이다. 내가 자기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게 맞긴 했을까? 그런 사람이라면 사실은 공부를 포기하고 몸을 돌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바닥을 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래 바닥이란 그런 거니까. 바닥을 치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다 보면 결국 끝까지 곤두박질치게 되는 성질을 가졌으니까. 


    끝까지 놓을 수 없던 열아홉의 그 마음을 기억한다. 아무도 내게 공부를 계속하라고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그만두라고까지 했었다. 끝내 공부를 붙들고 있었던 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일 년만 버티면 이 개고생이 끝난다는 간절함, 무엇보다도 이렇게까지 아플 줄 몰랐던 안이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아홉의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돌아가도 그 선택을 할 거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잘 모르겠다. 투석을 하기 전까지 대답은 언제나 예스(yes)였다.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러면 후회라도 하지 않아야 지금을 견딜 수 있으니까. 나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공부를 택했을 것이라고,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답하곤 했다. 


    이제 다시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저 소망을 읊는다. 그 시절의 내가, 열렬히 꿈꿔왔던 것이라도 그만둘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기를. 지금이 아니라도 나라면 언젠가는, 이라는 여유와 자부심을 앞세울 수 있는 사람이기를. 너무 큰 소망이라고 말한다면, 그저 아프지 않은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기를 바란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나는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하니까 이제는 어제를 덜 돌아보려고 애쓴다.  


    다시 지금의 백혈구 수치에 귀를 기울인다. 혹시 내가 그때처럼 무언가를 놓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염려하면서. 내 몸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에 찔려 아프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핀다. 이제는 무엇보다 살아가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려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까. 







각주:

1. 문페이스(moon face):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얼굴이 달(moon)처럼 동그래지는 증상

2. 루푸스의 특징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병원 사이트 참조.

3. 현재는 네이버에 검색만 해도 루푸스를 앓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볼 수 있다. 또한 2011년에 송영욱·정진호 서울대 교수의 '루푸스'라는 안내책자가 출판된 바 있다.

4. 채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건강에 좋다고 해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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