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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Apr 21. 2020

대충 살자고 말하는 유노윤호

발이 묶여버린 단거리 육상선수


    "어휴, 얘는 스님이 되어서도 머리 싸매고 열심히 할 애야. 어쩔 수 없어!"

    "예? 스님이 되어서도요?"

    "그래! 사주에 불이 세 개나 있어. 나무가 없는데 불만 새빠지게 지피느라 개고생을 하는 애구만."

    내 엄마 선희는 내게 역술인의 성대모사를 해가며 사주 보러 다녀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주에도 네가 몸을 갈아 넣어서 열심히 사는 게 나와 있다는 둥, 심지어는 자꾸 몸이 아프니 속세를 떠나면 어떻겠냐고까지 물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 그래, 맞는 것 같기도 하네"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에이, 그건 아니지"라고 부인하기도 했다.


    그랬다. 너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나는 120%로 사는, 몸을 갈아 넣어서 열심히 사는 종류의 인간이다. 시험이나 발표 같은 큰 성적이 걸린 일을 앞두고는 헛구역질과 배앓이를 해가면서 준비를 했다. 실력 발휘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만족할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정말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빠와 엄마에게 징징 거리면서 나의 힘듦을 토로했다. 곧 울 것같이 한 음절마다 축축 처지는 낮은 비음을 섞어 말하면 성우와 선희는 각자 다른 형태로 답했다. 성우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네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언제나 잘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 나는 "지금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니까아"라며 울먹였다. 그럴 때 선희는 옆에서 큰 목소리로 우리의 말을 덮었다.

    "희우야, 못하니까 학교에 배우러 다니는 거지, 잘하면 왜 학교에 다니냐!"

    그러면 나는 낑낑거리는 새끼 강아지처럼 아빠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웠다. "그 마음이 안 된다니까!"하고 소리쳤다. 그 말은 곧 '엄마는 내 마음을 몰라'라는 뜻이었다.


    서울대에서의 모든 평가는 나를 징징이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꽤나 의젓한 학생이었는데 그때까지는 공부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였나 보다. 하는 만큼 결과가 따라주었다. 그런데 대학교의 공부는 해도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체력은 친구들보다 훨씬 부족하고 스테로이드로 인해 기억력은 점점 떨어졌다*. 심지어 학교의 시험들은 관악 암기대회라고 악명이 높을 정도로 교과서 구석에 박힌 곳에서도 문제가 나왔다. 그 하나를 틀리면 B가 나오는 괴이한 형태의 시험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말라갔다.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교수님 말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뱉어냈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작은 문제 하나하나에 천착하면서 살다 보니 어느새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다른 친구들처럼 취미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으로 자아를 찾기에는 체력도, 내게 주어진 시간도 너무 부족했다.


    "야, 스물일곱 축하한다! 대박, 시옷에서 비읍으로 바뀌어서 빼박 후반이네"

    매년 내 나이를 짚어주는, 빠른 년생인 친구 선영이 얼마 전 카톡을 보내왔다. 

    "계속 나이 가지고 놀릴 거면 언니라고 불러!"

    나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답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선영의 장난에 결국 나는 그 애에게 서운함을 토해냈다.

    "나이로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는데 네가 계속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아야 할 것 같고 너무 신경 쓰인단 말이야. 몸 아파서 쉬기만 하는데 나이만 먹는 것 같고. 얼마나 서러운데."

    서글픔에 그 애에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선영은 바로 미안하다며, 매 해 장난처럼 말했어서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리곤 덧붙였다.

    "너한테는 미래가 더 불확실하게 느껴지겠지. 하물며 온 힘을 다해 노력조차 해볼 수 없는 컨디션이니까, 내가 느끼는 상실감이나 허무함에는 비교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너를 많이 이해해"


    차라리 직장에 다닌다면 쌓아가는 매일매일이 커리어가 될 텐데, 나는 대학원을 휴학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날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아픈 건 누가 스펙으로 쳐주지도 않는데. 나중에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취직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내게 이런 질문이 들어오겠지. 

    "학부는 왜 7년이나 다니셨고, 대학원 입학 후에는 대체 뭘 하셨나요?"

    그러면 나는 꾸며진 대답을 우물쭈물 늘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아픈 사람을 반기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몸이 아픈 이후로는 나는 늘 달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출발점이 다른 레이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는 그 레이스에 참가도 하지 못한다. 지금껏 같이 달려왔던 친구들이 이제는 나보다 훨씬 앞서 달리는 모습을 나는 벤치에 앉아 바라만 보고 있다. 나도 때론 협업하고 때론 질투하며 함께 달리고 싶은데. 나는 깍두기처럼 외로이 혼자만의 레이스를 하게 되었다. 나는 점점 초라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항상, 대충 살라고 말한다. 조금은 힘을 빼도 괜찮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80퍼센트만 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하지만 목표가 생기면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하는 습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대학교 새내기 때 친구들과 매일같이 나누던 이야기는 '오늘도 대충 살자',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포편(포기하면 편하다)'이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대충 살지 못했다. 나는 대충 살자고 울부짖는 유노윤호였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내가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모든 걸 촘촘하게 계획하고 수행하며 살아왔는데 그 계획에는 아플 수 있다는 변수는 없었다. 병에 걸린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체력 때문에 원하는 만큼 해내지 못하는 슬픔과 아쉬움은 언제나 뒤따랐고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오늘 해야 할 목표량을 반절도 채우지 못했는데 중력이 내 온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피로가 몰려올 때에는 어떻게든 집에 돌아와야 했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것처럼 흐리멍덩해져서 펜을 더 잡고 있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병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배우게 되었다.


    아파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데도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은 여전히 억울하고 서럽다. 그래도 한수희 작가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말하듯이, "나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애쓸 일은 없"으니까. 완벽주의인 내가, 열심히 할 수 없는 것은 몹시 비통한 일이지만,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대충 살아야지.






각주:

1. 스테로이드는 피하는 것이 최선인 이유. MERCOLA. 2019.12.04. <https://korean.mercola.com/sites/articles/archive/2019/12/04/%EC%8A%A4%ED%85%8C%EB%A1%9C%EC%9D%B4%EB%93%9C-%EB%B6%80%EC%9E%91%EC%9A%A9.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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