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나은 줄만 알았던 그때
단 한 번, 스테로이드 없이 지내던 때가 있다. 루푸스가 관해*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 후에는 겨울이면 약을 줄이고 여름이면 약을 늘렸다. 그러는 바람에 옷은 얇아지는 여름이면 빵빵한 얼굴과 몸이 드러나 속상했다. 그런데 2015년 겨울에는 완전히 약을 끊었다. 루푸스가 나아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추측해보자면 그즈음 먹었던 한약*이 잘 맞았고, 한약을 먹기 위해 식습관을 엄격히 관리했고 또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좀 내려놓았던 때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약을 끊게 되자 학부 내내 소망이었던 교환학생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어서 1차 지원에는 떨어졌고 2차 지원에 겨우 붙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도시, 오덴세(Odense)였다.
타지 생활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외향적이고 붙임성 좋은 성격에 '사막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환학생에 합격하고 내가 갈 학교에 대한 후기를 찾아봤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교환학생에 대해 로망이 클수록 오지 마십시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꼭 후대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선조의 마음으로 작성한 후기 같았다. 그의 논조는 실로 설득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코펜하겐에서 먼 시골 마을이다, 정보를 다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이라고 다 같은 유럽이 아니다 등. 나는 그가 도대체 어떤 교환학생 생활을 보낸 것인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7년 전에 쓰인 그의 글 하나 때문에 떠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서지는 않았다. 나보다 한 학기 전에 오덴세에 다녀온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주 심심하다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 나는 그 말 역시 새겨듣지 않았다. 학교 홈페이지에 나온 시설들을 보니 그렇게 후진 곳도 아닌 것 같았고 (우리 학교 건물보다는 좋아 보였다) 환경은 적응하기 나름이라고 믿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고 했는데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덴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타벅스도 기차역과 우리 대학교 안, 단 두 군데에만 있었다. 30분 걸리는 등굣길에는 숲과 밭만이 존재했다. 등굣길에 사슴을 보았다면 믿겠는가? 끔찍했던 것은 개강 첫 주 행사들이었다. 사회자가 도시의 특징을 설명하면(ex. 에펠탑 있음) 그 도시의 이름(ex. 파리)을 맞추는 퀴즈를 했다. 펍에서 도시 맞추기 퀴즈를 하는 행사라니! (심지어 유럽 도시들만 존재했다. 쳇.) 10시면 문 닫는 펍이라니! 나는 두 번째 도시 퀴즈를 하고서 모든 행사에 흥미를 잃었고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남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거였다.
나는 기숙사 방 안에 앉아있을 때마다 '내가 혹시 유배를 당한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내가 꿈꾼 교환학생은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며 수업을 듣고, 수업 후에 같이 자전거를 타거나 관광지에 들르고, 저녁에는 센 강 같은 멋진 경치를 거니는 것이었는데. 기숙사 애들은 금요일에 헤비메탈을 틀었고, 파티할 때를 빼고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여기에 나 말고 누가 사는 게 맞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유배생활로 교환학생을 마치거나 반쯤 미쳐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싶었다.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 교환학생의 목적은 단 두 가지. 유럽 여행과 해외에서 살아보기였다는 걸 상기했다. 교환학생으로 있던 여섯 달 중 절반은 다른 나라들에 가 있었다. 이 주마다 한 번 여행을 다녔다는 말이다. 감사하게도 오덴세의 수업들은 출석체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처음엔 눈치를 봤지만 점점 거리낌 없이 결석을 했다. 우리 학교는 교환학생 과정을 '이수'로만 인정해주기 때문에 성적에 연연할 필요도 없었다. 수업 중에도 비행기표를 물색했다. 라이언 에어나 이지젯 같은 유럽 저가 항공을 이용하면 왕복 5만 원에도 벨기에를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성실히 여행을 다녔다. 다행인 것은 스테로이드를 끊은 탓인지, 루푸스가 관해된 덕분인지 어느 정도 체력이 따라주었다는 것이다.
벨기에, 스페인, 런던, 체코,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에 다녀왔다. 처음 몇 번은 오덴세의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했고 나중에는 혼자서도 잘 돌아다녔다. 유럽의 멋진 도시와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들로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자주 바뀌었다. 스테로이드를 먹지 않는 내 얼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인스타그램의 사진도 좋아요를 많이 받았다. 오덴세와 관광지를 번갈아 누비며 심심함과 즐거움의 극단을 오갔다.
3월이 됐는데도 오덴세는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세연이는 곧 튤립이 필 것 같다며 사진을 보내왔는데 나는 시내를 온종일 걸어도 들꽃 하나 발견하기 어려웠다. 한 달이 넘게 쨍한 햇볕을 받지 못하니 나조차 무채색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3월 말에 들렀던 스페인의 세비야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거리마다 오렌지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주홍빛으로 기억되는 따뜻한 도시였다. 광장에는 관광객을 실은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지나다니고 길가에는 아이들이 깔깔대며 비눗방울을 크게 불고 놀았다. 회색빛에만 둘러싸여 있다가 색색의 옷을 입은 하늘과 건물들 사이에 섰을 때, 내 안에서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스테로이드가 없는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퉁퉁 붓지 않은 얼굴, 이전보다 확연히 늘어난 체력, 매일 챙기며 살아온 약봉지가 사라진 것. 한국에 있었으면 여름이 다가오면서 또 약을 늘릴지도 몰랐다. 언제나 걱정 주머니들을 달고 살았으니 스트레스에 취약한 루푸스는 기필코 다시 일어섰을 것이다. 오덴세에서는 걱정거리라곤 다음 식사엔 또 뭘 먹지, 하는 것뿐이었다. 여행지에서는 그것조차 없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언제나 중간고사만 끝나면, 과 배정만 끝나면, 텝스 시험만 끝나면, 전과만 끝나면 등의 이유로 치열과 최선의 기한을 늘려가야 했다. 유럽에는 단 6개월. 그 이상의 미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오롯이 현재를 살 수 있었다.
루푸스가 이렇게 늘 잠만 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체 언제 아팠나 싶을 정도로 루푸스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우울증도 비슷하다고 들었다. 우울 삽화가 지나고 나면 언제 우울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우울 삽화에 들어서면 언제 괜찮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루푸스가 활동하면 나는 영영 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오덴세에서는 아픈 시간이 있었던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내가 다 나은 줄만 알았다.
어떤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각주:
1. 관해: 완화. 증상 및 징후가 감소하거나 사라진 상태. 부분 관해와 완전 관해가 있다.
2. 한약이 루푸스에 좋다는 과학적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후 에피소드에 나오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루푸스 전문 한의원에 다녔다.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3. 국가로 표기된 곳은 도시 2개 이상, 도시로 표현된 곳은 한 개의 도시만 간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