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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y 08. 2020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아무것도 없어 上

    "세상에 너랑 나한테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어."

    드라마 <고백 부부>에 나오는 대사를 종종 떠올린다. 사람들은 나쁜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내가 지금 이 모습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예전부터 미래 계획에서 건강은 당연한 전제조건이었다. 내가 꿈꾸던 스물여덟 살 나의 모습은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빨간색 SUV를 타는 멋진 여성이었는데, 지금 나는 백수인 데다 5년째 장롱면허다.


    고통의 서막은 2017년 여름 시작되었다. 덴마크에서 즐거운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온 나는 날씬해진 얼굴과 되살아난 체력을 만끽하며 미래를 계획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 막 학기 전공 수업을 듣고, 로스쿨 시험 준비를 위해 스터디와 학원을 강행하며 지냈다. 생각보다 모의고사 점수가 높게 나오자 나는 더 조급해졌다. 조금만 더 하면 올해 시험에서 SKY 로스쿨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빼곡히 짜인 일정은 나를 종종 숨 막히게 했지만, 그때 나는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 두 달 전 스테로이드 증량을 선고받았다. 겨우 끊은 스테로이드를 다시 먹기 시작하면 얼굴이 붓고 체력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요즘 무리한 것 같다며 한 달 정도 지켜보자고 의사 선생님을 졸랐다. 그러나 한 달 후에도 결과는 같았다. 나는 울먹이며 의무기록 사본*을 떼어 한의원으로 향했다. 푸근한 인상의 한의원 원장님은 검사 결과를 차근차근 살펴보며 아직은 괜찮다고, 컨디션 관리를 잘하며 지켜보자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기대어 약을 먹지 않았다. 당장 미미하게 오른 수치보다 눈 앞에 보이는 듯한 찬란한 미래가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로스쿨 시험이 끝나고 며칠 뒤, 갑자기 머리가 무겁고 명치 부근이 저릿해왔다. 약과 죽을 먹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고작 김 한 장을 먹은 것뿐인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 급한 대로 싱크대로 달려가 게워냈다. 배를 움켜쥐고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두 달이 넘도록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위염이겠지, 하며 버텼지만 추석 당일 뱃속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밤새 심해지는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울다가 집 근처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곳엔 언제나 나보다 위급한 환자가 많았다. 두 시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한 채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나가는 의사나 간호사를 붙잡아 애가 너무 아프다고 연거푸 말했다. 진통제를 맞았지만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며 피를 뽑아간 의사들은 다급하게 나를 이송 침대에 눕혔다. 코 앞에 있는 화장실에 가다가도 심정지로 사망할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삐용 삐용 소리를 내는 구급차에 묶인 채 실려갔다. 왼손은 아빠의, 오른손은 엄마의 손을 잡은 채 구급차는 내가 원래 다니던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별로 안 아픈데 묶을 것까지 있나?, 차들이 다 비켜주네, 신기하다, 구급차는 처음 타 본다." 같은 말들을 하며 웃어 보였지만 실은 등골이 서늘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애써 지은 미소는 딱 일주일짜리였다. 추석 연휴 후 조직검사를 하자마자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됐다. 어지럽고 힘이 없어 침대에 붙어 내내 잠만 잤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휴대폰을 쥘 수 없었고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복수가 차서 배가 부풀어 오르고 생식기도 부어 올라 피부가 쓰라렸다. 낮에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메스꺼워서 오심을 막아주는 주사를 맞고, 밤에는 토하고 울다 지쳐서 겨우 두세 시간을 잤다. 새로 바뀐 까칠한 의사 선생님은 회진을 올 때마다 한숨을 쉬고, 당장 투석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겁이 났다.


    신장 세포가 겨우 55% 남았다고 했다. 그마저도 병든 세포들이 있어 사구체 여과율*은 고작 23%였다. 그런 수치들은 잘 와 닿지 않았지만 온몸이 내가 아프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뱃속에 풍선이 든 건지, 내가 펭귄이 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배는 점점 부풀어갔다. 허리도 아프고, 앉아 있으면 배가 앞으로 쏠려 고역이었다. 똑바로 누우면 배가 몸을 눌러서 새우잠을 자야 했고, 뱃속 장기가 눌리는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긍정을 끌어모아 임신체험을 하는 거라 생각하며 동그란 배에 태명도 붙여주었다. 첫째는 튼튼이였다. 배가 팽창해 피부가 찢어질 듯이 아프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쯤 복수 천자 시술을 했다. 옆구리에 호스를 꽂아 물을 빼내는 시술이었다. 한 번 할 때마다 2리터가량의 노란 물이 나왔고 몸무게는 2.5킬로그램 정도가 빠졌다. 내가 태어날 때 2.66킬로그램으로 태어났으니 정말 아기의 무게 같았다. 


    처음 복수 천자 시술을 하고 나서는 '순산 기념 빵 파티'를 했다. 프레첼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주치의 선생님이 내게 와 "복수 또 차면 실망할 텐데"라고 악담 같은 걱정을 건넸다. 나는 '이제 겨우 복수를 뺐는데 그렇게 빨리 또 찰리가 있나?'라고 의아해하며 그 순간을 즐겼다. 오후가 되자 정말로 배가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 후 복수를 빼내는 시술을 다섯 번 반복했다. 두 번째까지는 이름을 지어줬지만 세 번째가 되자 화가 나서 도저히 이름을 지어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고통이 반복될지 알 수 없었다. 복수를 빼는 동안에도 재잘대던 나는 갈수록 말이 멎었다.


    스테로이드 충격요법을 두 번하고, 셀셉트 등의 면역 억제제를 쏟아부었는데도 수치도 컨디션도 정상범위 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 약까지 효과가 없다면 항암제인 싸이톡산을 써야 한다고 했다. 독한 항암제이니만큼 불임의 가능성이 있어서 산부인과에서는 나를 볼 때마다 난자 냉동을 권했다. 신장내과에서는 하루빨리 싸이톡산을 맞아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다고 독촉했다. 심지어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신장 수치로는 앞으로 임신 못 해요. 본인 몸부터 살려야죠."

    몸의 고통을 절절히 느끼고 있던 나는 의사 선생님의 모든 말을 곱씹었다. 이건 무슨 뜻일지, 앞으로 어떤 치료를 한다는 건지, 조금은 나아졌다는 건지, 항상 약간의 여지를 품은 말들을 하루 종일 붙잡고 씨름했다. '본인 몸부터 살려야 한다니, 이걸 안 하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나는 죽음을 걱정할 정도로 몸이 많이 아픈 건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을 못 한다고 굳이 말해야 하나?' 커튼과 함께 마음의 문을 닫고 홀로 그런 생각들을 이어갔다. 결국 싸이톡산 치료를 시작했고 나는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몸을 달달 떨면서 힘없이 누워 있었다. 베갯잇이 자주 젖었다.


    그 무렵 병실 텔레비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매일 보던 예능 프로에서 해맑게 웃고 있던 그가 갑자기 죽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내 존재마저 위협했다. 도처에 죽음이 널려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겨우 살려놓은 내 목숨은 언제라도 쉽게 바스러질 수 있는 종잇장에 불과했다. 내게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설령 그게 갑작스러운 죽음일지라도.


    너덜너덜한 하루들이 한 달이 되도록 이어졌다.






각주:

1. 의무기록 사본: 환자의 질병에 관한 사항과 병원이 치료를 위해 시행한 모든 사항이 기록된 문서. (삼성서울병원 참고)

2. 사구체여과율: 신장의 기능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치. 얼마나 혈액을 깨끗하게 거를 수 있느냐를 나타낸다. (대한 신장학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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