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살아내야지
"모든 걸 다 포기했는데, 대체 뭘 더 포기하라는 말이에요!"
나는 먹던 밥을 입에 물고 옆 침대 이모들이 놀라 쳐다보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울부짖었다.
새로 바뀐 교수님은 내게 자주 가혹한 말을 뱉었다. 임신을 못 할 거라는 둥, 내일이라도 투석을 해야 한다는 둥. 초점 없는 눈을 하고 그에게 물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곧 죽느냐고.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쉬고 자리를 떠났다. 회진만 끝나면 엉엉 우는 나를 보고 엄마는 교수에게 가서 조용히 말했다. 나이가 스물다섯이어도 아직은 아이라고, 심각한 이야기는 부디 보호자와 상의해달라고. 하지만 교수는 냉정하게도 "어려도 환자 본인이 알 건 알아야 한다"라고 답했다. 회진이 끝날 무렵 내 눈엔 종종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존심이 상해서 잔인한 교수 앞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기 싫었다.
그런 내 모습을 알아챈 주치의는 회진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내게로 달려왔다. 울음을 삼키고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던 내게 그는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눈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눈물이 터져버렸다. 학교도, 로스쿨도, 앞으로의 계획도 전부 다 포기했다고. 그런데 대체 뭘 더 포기해야 하느냐고, 의사라는 사람이 환자인 나를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주치의는 자기가 괜히 말을 걸었다며, 내 등을 토닥여주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티다가 악화된 몸으로 입원한 환자. 갑작스레 바뀐 교수. 우리는 서로를 탐색할 시간도 없이 회의를 하듯 내 몸에 대한 말을 주고받았다. 그에게는 내 몸이 객관적인 대상, 그뿐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내겐 한없이 절실한 이야기들을 이성적인 척 받아쳐야 할 때마다 내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실랑이 끝에 받게 된 싸이톡산 항암치료 후로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득 찬 복수, 심한 요독과 항암제 부작용이 겹쳐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요독이 심해 먹는 족족 토하던 나는 구역질에 지쳐서 곡기를 끊어버렸다. 배나 사과 세네 조각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냈다. 입원 후 첫 일주일 동안 병원을 방방곡곡 누비며 친해진 이모와 언니들은, 소실되어가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아가가 아파서 어쩌누, 하는 다정한 말이 미약한 맥이 뛰는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어떻게든 살아야지. 버텨내야지."
옆 침대 이모가 몸을 달달 떨며 누워있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지방에서 온 옆 침대 이모에게 서울 지리, 병원 길 안내 등 도움을 준 후로 이모는 내게 매일 좋은 말을 해주었다. 기독 방송에서 들은 좋은 말씀, 인터넷에서 본 명언 같은 것들이었다. 나의 가족은 혹여나 내가 더 힘들까 나의 절곡을 말리지 못했다. 반면 이모는 영양사를 졸라 내게 누룽지를 얻어다 주었다. 나는 누룽지부터 시작해 천천히 양을 늘려가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싸이톡산이 효과를 발휘한 건지, 부작용이 사라질 때쯤 컨디션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기 시작한 후로는 복수가 찼어도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 그제야 조금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야지. 매일 울다가는 몸이 더 망가질 것만 같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쯤 겨우 끄적인 일기는 이렇다.
밥 먹기 시작한 지 3일째. 싸이톡산 치료를 하고 나니까, 일주일 동안은 정말이지 먹토잠울(먹자마자 토하고 잠들고 우는 것) 뿐이었다. 여린 내 동생은 하루 종일 내 등을 두드려 주다가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줄행랑쳤다. 다시는 오지 못하겠단다. 폰을 들면 손이 떨려서 메시지 답장도 못하고 목소리가 안 나왔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느려도 먹고, 직립 보행할 수 있다. 하루 종일 과일 반쪽을 먹다가 쌀을 먹으니까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엑스레이 찍으러 본관 1층에 갈 때, 휠체어 없이 걸어서 다녀올 수 있어 감사한 하루였다. 오늘 처음 수혈을 받았는데 평소 헌혈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얼른 집에 가고 싶다.
감사한 일을 찾아다니며 버텼다. 병원 생활의 불편하고 힘든 점을 찾으려면 수만 가지도 있었지만 언제까지 불평만 할 수는 없었다. 좋은 생각이 좋은 몸을 만든다고 믿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기도 했다. 누룽지만 먹다가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그다음에는 칼륨 약을 끊고, 인 조절제를 끊고, 알부민 주사를 끊고, 스테로이드 충격요법도 끝나 몸에 달린 모든 줄을 떼어냈을 때 나는 정말로 감사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줄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몸이 조금씩 낫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싸이톡산을 맞고 머리가 잔뜩 빠져도, 머릿결이 많이 상했으니 이참에 다 새로 나는 것도 괜찮은 일일 거라며,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물론 때론 고비도 있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인데 감기 걸려서 너무 힘들어요."
내가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연락해 온 친한 후배 지연의 문자였다.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렸지만 그 애는 계속 자신이 고달픈 이야기로 회귀했다. 나는 로스쿨 시험을 치르고도 몸이 아파 학부 졸업을 못 하는데. 덕분에 로스쿨은 지원도 못 해보게 생겼는데, 자신의 감기 이야기를 연거푸 꺼내는 그 애가 솔직히 미웠다. 같이 로스쿨을 준비해온 사이여서 더 샘이 났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감정적 기대가 더 커져서 실망도 불어났다. 자연스레 지연의 연락을 피했고 그 애와 연락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입원한 지 꼬박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퇴원했다. 여전히 복수가 조금 차있었지만, 수치가 많이 돌아왔다고 했다. 내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잠을 잘 수 있다니 신이 나면서도 두려웠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다시 일주일 전처럼 아파져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난데없이 전해진 좋아하는 배우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처럼 나 역시 사고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나쁜 징조가 있던 것도 아니고 늘 회의적이던 의사가 돌아가도 좋다고까지 말했는데, 나는 어쩐지 두려웠다. 이제 내겐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사무치게 알아버린 탓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행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나는 내 침대에 누워 꼬박 열세 시간을 잤다. 그동안 밀린 잠을 자고 나니 개운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