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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y 19. 2020

저는 아직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요

    분명 낫고 있는 중이었다. 싸이톡산 치료가 잘 맞아서 신장 수치가 좋아졌다고 했었다. 아픈 몸보다 미래를 생각해보려고 겨우 용기를 내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2019년 6월, 나는 다시 일 년 반 전에 입원했던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퇴원한 지 딱 일 년째 되던 2018년 11월,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크레아티닌* 수치가 심상치 않다고. 빠르게 나빠지고 있어서 이대로 가면 1년 안에 투석이나 이식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카로운 그의 말이 더 뾰족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의 말이 항상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정상 범위로 들어온 신장 수치 덕분에 대학원에도 들어갔는데, 미래를 꿈꾸는 내 속도 모르고 신장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의사 선생님의 말은 곧 현실이 됐다. 나는 대학원 1학기를 마치자마자 입원했다. 세 번째 조직검사를 했고 나의 신장은 이제 고작 20%만 살아 있다고 했다. 루푸스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고 염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손 쓸 방법이 더는 없다며,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퇴원한다는 사실을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열심히 살다가 몸을 망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환자임을 되새기며 살았다. 복수가 차서 걷지도 못했던 것, 과일 서너 조각으로 하루를 연명하던 것이 고작 몇 달 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결국 신장은 망가졌다. 내 탓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지난 일 년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 다시 신장을 망가트렸는지 살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다. 설령 그게 나일지라도.     


    루푸스 신염이 내 삶을 온통 옭아맬 때에도 회복만 하면 언제든 다시 평범한 친구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음식과 꾸준한 운동으로 관리를 하면 다시 나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투석이나 이식은 회복 불능을 뜻했다. 이식을 해도 새 신장을 20년 이상 쓸 수 없고 투석은 신장을 대체할 뿐이지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 중 어떤 것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나의 삶은 친구들과는 영영 다른 삶이 될 것 같았다.      


    퇴원 후 어느 날, 친구와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1호선 열차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외출한 지 한 시간 만에 다리가 퉁퉁 부어버렸기 때문에 서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다리에 모든 피가 쏠리는 것 같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오직 임산부석뿐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내게 친구는 열차 칸에 임산부가 안 계신 것 같으니 잠시 앉아있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몇 분 후 당장이라도 지하철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지자, 그 자리에 가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덜컹이는 열차 속에서 고통을 견디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몸이 천근만근이어서 울음이 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내 몸 상태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투석이 다가올수록 내가 내 몸을 견딜 수 없었다. 나의 삶은 점점 좁아졌다. 깨어 있는 시간,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고 나는 계속 멍해졌다. '이런 삶이라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깨어있는 몇 시간도 텔레비전 앞에만 내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속상했던 적은 많고 많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는 처음이라 몹시 낯설고 두려웠다.     

    "엄마, 내가 엄마보다 오래 살 수 있을까?"

    컨디션이 바닥을 치던 날 나는 차마 선희를 쳐다보지 못하고 천장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삶이 점점 소실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천근만근인 몸을 지고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기도 했다. 희는 항상 슬퍼하는 내게 힘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날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글쎄..."라고 말하면서. 나는 어쩐지 더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남아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루푸스는 또다시 나를 잠식했다.   



       


각주:

1. 크레아티닌: 혈청 크레아티닌 수치는 콩팥 기능의 지표로 사용된다. 여자의 경우 0.6~1.0 mg/dL이 정상 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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