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우라는 이름에 대하여

기쁨과 걱정을 그러모아, 희우.

by 희우

[네이버 국어사전]

희우1 喜雨

가뭄 끝에 내리는 반가운 비. 또는 농사철에 알맞게 내리는 반가운 비.

희우2 喜憂

기쁨과 걱정을 아울러 이르는 말.




1984년, 성우와 선희는 학생 자율화 추진 위원회에서 만났다. 선희는 중고등학교 때 차례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큰 오빠마저 뇌출혈로 쓰러진 상황이었다. 밑으로 딸린 어린 두 동생을 생각하며 선희는 자신이 학생운동을 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던졌다. 성우의 아버지는 가난한 말단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오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안 해본 장사가 없으며 심지어는 그의 초등학교에 외벽을 칠하는 페인트공으로도 왔었다. 성우는 속으로는 가난한 부모님을 조금은 부끄러워하고 그런 자신을 더 부끄러워하며 자랐다. 오 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아버지가 남기신 계란 프라이를 독차지하며 컸고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성우는 서울대학교의 자율화 추진 위원회장이었다. 선희는 고려대학교의 부위원장이었다. 고려대학교의 위원장이 부모님의 만류로 회의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관계로 선희가 대신해서 회의에 갔다. 한 사람의 부재가 후에 적어도 한 생명을 낳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덕에 선희와 성우, 둘은 공식 대표이자 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우는 민정당 중앙당 점거농성 배후로 몰려 박종운 등과 함께 공개 수배되었다. 선희와 성우는 서로의 수배 기간 중에도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 성우는 결국 86년 9월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된다. 선희는 성우가 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를 변함없이 사랑했다. 어쩌면 사랑이 더 깊어졌을 것이다. 선희 또한 당시 불온서적과 유인물을 취급했단 이유로 내부적으로 수배 상태였기 때문에 선희는 성우의 큰 형수처럼 변장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갔다.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아이가 둘이나 딸린 큰 형수로 그를 찾아간 것이기에 면회 중에 혹시라도 말실수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다. 그를 보기 전까지 심장은 토할 것 같이 울렁거렸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는 그저 먹먹하여 눈물만 지었을 것이다. 둘은 혹시나 빼앗기거나 누락되는 편지가 있을까 걱정하여 편지에 번호를 붙여가며 사랑과 믿음을 전했다. 성우는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이겨내고 살아서 88년 5월 출소한다.


선희와 성우는 89년 10월 영원을 약속하며 결혼한다.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생활은 궁핍했고, 아이들을 낳아서 고생시키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93년 7월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가지게 된다. 희우, 가뭄 끝에 내리는 반가운 비라는 뜻과 같이 그들의 어여쁜 아이는 고되었던 생활 끝에 내려진 축복이었다. 선희는 부모님의 사랑으로부터 결핍되어 자랐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되었다. 성우는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한 번도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던 자비로운 아빠가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 속에서 자라난 나는 그들을 경애하고 사모하는 뜻으로, 이름의 한 글자씩을 따와 스스로에게 이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는 한때 그들에게 학생회장, 수석입학, 서울대 진학 등의 멋진 꼬리표를 선물하며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지만, 한창 꽃을 피워야 할 십 대 후반부터는 그저 아픈 딸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기쁨이었지만, 이제는 큰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혹은 어느 자식이나 그렇듯 큰 기쁨이자 큰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선희는 내가 병원에 입원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좁고 딱딱한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자고 출근했다. 그리곤 이따금 말했다, "우리 꼭 여행 온 것 같다, 그치?" 나는 이 말이 너무도 애달프다. 그녀가 출근한 후 한가로운 병원의 낮 시간, 나는 딱딱한 보호자 침대에 혼자 앉아 그 말을 가만히 만져보곤 했다. 성우는 퇴근하고 병원에 들러 저녁 식사를 꼬박꼬박 체하고 마는 내 손을 붙들어 꾹꾹 눌러 주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모든 것을 게워내기만 했을 때에도, 그는 아주 두텁고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러면 눈물이 한 방울 흐르곤 했다. 약간은 거칠고 두툼하고 따뜻한 그의 손은 항상 안정을 주었다. 아픈 딸보다 더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조금도,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티를 낸 적이 없다. 나는 괴롭고도 행복한 이번 생을 그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것에 몹시 감사하다.


나는 글에는 치유와 위로의 힘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동안 울면서 글을 토해내야만 했을 때, 번져가는 볼펜 자국들을 보면서도 마음은 후련했기 때문이다. 또 나의 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의 아픔을 노래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염원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어떤 인생의 고비 -취직이라든가 입시의 상황-에 놓여 있다면, 직업적·학문적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통해 알았으면. 너무 애쓰느라 스스로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신은 먼저 알았으면. 또 당신이 나처럼 아픈 몸을 살고 있다면 아픈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를 위해 나의 아픔을,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빛바랜 슬픔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렇게 나와 당신의 기쁨과 걱정들에, 희우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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