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술을 딱 붙이고 올라오는 울음을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지만,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떼면 곧바로 울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종이접기를 좋아하고 누가 말을 걸면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는 아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주목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는 싸움이 붙어도 매 번 내가 맞아주다가 결국엔 먼저 서럽게 울어버렸다. 게다가 운동 신경이 없어서 훌라후프, 줄넘기, 자전거 타기 따위의 몸을 쓰는 모든 것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를 못 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고집불통의 성격이어서 그럴 때면 분이 나서 씩씩거리며 울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체육시간에 잘 못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줄넘기를 못 해서 창피했다고 엄마 앞에서 조잘거리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히끅히끅 울었다. 엄마는 내 손목을 낚아채 안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안방이 제일 넓었다. 엄마는 나를 거기 세워두고 줄넘기 줄을 가져왔다. 그리고 방 한쪽 끝에서부터 다음 쪽 끝까지, 줄을 먼저 넘기고 발로 바닥에 있는 줄을 넘는 이 일련의 동작을 100번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다고 줄넘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힘 빠진 어깨로 줄을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발을 질질 끌며 줄을 넘었다. 몇 번 이렇게 하자 엄마는 똑바로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조금 몸에 힘을 들여서 줄을 넘기고 발로 그 줄을 넘었다. 조금만 하면 엄마가 그만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내가 100번을 다 할 때까지 옆에서 계속 지켜봤다. 49번쯤에는 50번까지 하면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해줄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나는 80번쯤 되자 그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 100번을 채우고 나서는 엄마가 줄넘기를 한 번 제대로 해보라고 했다. 아주 약간은 나아졌다. 한 번은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내심 신이 나서 입꼬리가 비죽 비죽 올라갔다. 엄마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인정하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남자애들은 자꾸만 나를 때렸다. 엄마는 일을 하느라 하교 후의 나를 곧바로 돌봐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다니던 유치원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학교까지는 크고 가파른 언덕 하나를 넘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낮은 언덕길을 두 개 정도 지나야 했다. 우리 반에는 안창현이라는 야구부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키가 아주 크고 파마한 것 같은 곱슬머리였다. 코 왼쪽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를 생각하면 그 점이 빼놓지 않고 생각난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애는 내가 친구랑 하교할 때 뒤를 따라오면서 발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계속 걷어찼다. 나는 걔가 찰 때마다 뒤돌아서 "하지 마"라고 말하며 그 애를 있는 힘껏 째려봤다. 안창현은 실실 웃고 눈을 찢으면서 나를 골렸다. 멈추지 않았다. 결국 얼마 가지 못 해 멈춰 서서 엉엉 울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싫다고 했잖아!" 그 애는 잠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놀라더니 그 길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날만 그렇게 끝날뿐이었다. 그 애는 한동안 매일매일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발로 나를 찼다. 선생님께 일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여자애를 놀리고 싶어서 때리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내 하늘색 곰인형을 제일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때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한테 이 일을 말했더니 엄마는 나를 태권도에 보냈다.
그렇게 시작한 태권도에 나는 정을 많이 붙였다. 여전히 내가 못 할 것 같은 동작은 시도조차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뜀틀에 대고 앞구르기를 하는 동작들 같은 것에는 차례가 와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범님들도 "희우는 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서 괜스레 특별한 예쁨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소심했지만 화가 많았던 나는 주먹 앞지르기를 하며 소리 지르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사범님이 박수를 치면 우리는 그 박자에 맞춰 앞으로 주먹을 지르며 소리쳤다. "하! 면! 된! 다! 태! 권! 도! 할! 수! 있! 다! 희! 우!" 소리를 지르는 내 목소리가 귀에 들리면 속이 시원해지고 뿌듯했다. 양파 먹기, 수업시간에 화장실 다녀온다고 여쭈기 같은 어려운 것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권도에는 여자애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고학년 오빠들은 나를 귀여워했다. 나도 남동생이 있어서 오빠들도 어렵지 않았다. 오빠들은 나를 데리고 잘 놀아주었다. 일부러 내가 다니는 시간에 맞춰서 태권도장에 오기도 했다. 태권도가 끝나면 같이 오백 원짜리 컵 떡볶이나 피카츄 돈가스를 사 먹으면서 몰려다녔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남자애들도 없었다.
4학년 때에는 드디어 품띠를 따기 위한 승품심사를 보게 됐다. 국기원에서 심사를 보는데 잠실 학생체육관으로 가야 했다. 태권도를 열심히 다닌 만큼 품새 심사는 곧잘 치렀다. 그런데 겨루기 시합도 심사에 포함된다고 했다. 나 같은 쫄보는 겨루기를 한 번도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합을 맞춰 발차기를 몇 번 주고받아 본 적은 있었지만. 모르는 상대와 겨루기를 해야 한다니 너무 무서웠다. 그것도 안 하겠다고 버티고 싶었지만 그러면 품띠를 딸 수 없었다. 사범님과 오빠들의 응원을 받고 경례를 하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너무 무서워서 상대방 아이에게 찍어 차기 세 번을 연달아했다. 내 주특기였다. 나는 유연해서 다리가 높이 쭉쭉 올라갔다. 세 번 하고 나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익- 심판을 쳐다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얘, 너무 너만 발차기를 하니까 상대방 실력을 보기가 어려워. 너는 이번에는 막기만 해 보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무서워서 발차기만 마구 해댔는데 갑자기 나한테 막기만 하라니. 이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하는데 상대방 여자애가 코를 잡고 말했다.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그러고선 손을 내려 자기 코를 보여주었다. 쌍코피가 흘렀다. 그 이후로 내 모든 게임 아이디는 '쌍코피의 스타'가 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태권도 오빠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나는 그 별명이 내심 자랑스러워서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얼마 전 엄마의 일기장을 찾았는데 내 태권도 이야기도 있었다.
2002년 (3학년 때) 6월 19일 엄마의 일기장.
지난번 대학원 진학을 고려할 때 웅이가 태권도에 자꾸 빠져서, "엄마는 더 공부하고 싶어도 여건도 안 되고, 돈도 없어서 못 하는데, 너는 엄마가 열심히 배우라고 한 달에 65,000원씩 등록해주는데, 왜 빠지냐? 다 배우는 거 중단해! 엄마나 공부하자!" 했더니, 희우가 "나는 태권도, 피아노, 영어 안 빠지고 잘하니까 끊지 말아요"했다. 그러더니 "엄마가 내년에 대학원 못 가면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대학원 보내줄게"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알아서 하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예쁜 희우. 그가 내 딸인 것이 고맙고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아빠는 이 일기장을 보여주니까 그때의 내가 눈치가 없고 약간 재수 없다고 킬킬거렸다.)
2002년 8월 7일 엄마의 일기장.
지난달 집주인이 바뀌었다. 계약 기간은 보장한다고 한다. 2년 뒤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 빚을 빨리 갚아야 할 텐데...
130여만 원(선희) + 130여만 원 (성우) = 260만 원.
성우 활동비- 70만 원
(아이들) 희우: 태권도 7만 원, 영어 10만 원, 컴퓨터 2만 5천 원 = 19만 5천 원
웅: 영어, 컴 = 12만 5천 원
+용돈 +α = 40만 원
이자 25만 원
생활비 105만 원.
...
희우의 태권도와 피아노 교습을 끊으려 했으나 희우가 태권도에 애착이 많아서, 검은띠 딸 때까지 다니기로 하였다.
엄마의 일기장에서처럼 당시 우리 집은 어려웠다. 아빠는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명예 봉사직 지방의원이었다. 돈은 벌어오지 않으면서 밖에서 쓰는 경조사비와 활동비는 많았다. 엄마는 고려대를 나왔지만 아빠 선거운동을 돕느라 제대로 장기근속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격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되었다. 심리학과에서 유사 과목을 인정받아 보육교사 자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대학 동창회에 가지 못 했는데 주변 친구들은 거의 교수나 국회의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벌이 어린이집 교사의 빠듯한 가계 형편에서는 동창회에 끼기가 어려웠던 거다. 결국 나는 검은 띠를 따고 얼마 되지 않아 태권도를 그만둬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엄마랑 태권도를 그만두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학교에서도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별을 겪는 건 유치원 이후로 처음이었다. 초등학교도 아직 졸업해보지 않았으니까. 고학년이 될수록 학교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버려서 인생은 지겹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애착을 가졌던 공동체에서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창가 자리였던 나는 수업시간에도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내다봤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는 친구들을 쳐다보다가, 정문을 바라보며 거기로 나가서 조금만 걸으면 있는 태권도장을 떠올렸다. 실내화 주머니를 달랑달랑 거리며 태권도로 갔었는데. 반 친구들하고 떡볶이 먹는 것보다 태권도장에 가서 슬러쉬를 먹는 게 더 좋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게 슬퍼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들면 책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결국 와버린 태권도장 마지막 날. 엄마는 아침에 내가 학교 가기 전에 말했다.
"오늘은 가서 사범님께 인사 잘 드리고 와"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이 가난해서 내가 태권도를 더 다닐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나는 떼쓸 수가 없었다. 더 다니고 싶다고 우겨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카드값 내는 날만 돌아오면 세상을 다 짊어진 듯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숨만 쉬던 걸 몇 번이나 봤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럴 때면 내가 알랑방귀를 뀌어도 "이따가"라고 말하고는 다시 카드와 계산기를 번갈아보곤 했다. 나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책가방을 두고 신발장 옆에 쪼그려 앉았다. 태권도장에 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진짜 마지막이었다. 터덜터덜 운동화를 질질 끌며 대문을 열고 나왔다. 슬프고 시린 마음이 낯설고 간지러워서 나는 언덕을 내달렸다. 빠르게 달리면 왠지 그런 기분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태권도장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잡고 숨을 한 번 더 크게 들이쉬었다. '할 수 있다!' 매일같이 태권도장에서 앞지르기를 하며 소리치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태권도장에 들어가니 도복을 입지 않은 아이는 나뿐이었다. 벌써 나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서글펐다. 고개를 떨구고 관장님 방에 노크를 했다. 그리고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말했다.
"사범님 저 이제 태권도 그만둬요"
사범님은 내쪽으로 오며 왜? 하고 물었다.
그 질문을 듣자 울음이 올라왔다. 대답하기가 싫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심호흡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숨이 계속 가빠졌다.
"돈이 없어서요" 마지막 한 글자를 내뱉으면서 나는 '어어어엉' 하고 소리 내 울어버렸다. 서러웠다. 사범님은 어린아이의 고백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어깨를 계속 다독여줬다. 그리고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멍했기 때문이리라.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친한 남자애 홍영일과 초등학교 때 내가 살던 동네에 놀러 갔다. 그 애는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고 다른 동네에 살아서 우리 동네에는 안 가봤다고 했다. 나는 우리 집이 있던 곳과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 걔를 데려갔다. 그 애 이름은 홍영일인데 우리 학교는 영일초등학교라며 킬킬대고 웃었다. 초등학교까지 왔더니 근처에 있던, 내가 좋아했던 태권도장이 생각났다. 아직도 운동장 한편에 자리한 정글짐 위에 올라가면서 이 근처에 내가 다녔던 태권도장이 있다고 말했다. 가보고 싶은데 그만두고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했더니 홍영일은 그럼 오늘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태권도장에 들어갔다. 우리 사범님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태권도장은 우리 사범님 태권도장이니까. 다른 사람이 있는 건 말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던 걸까. 다른 분이 도복을 입고 계셨다. 관장님과 사범님이 모두 바뀌었다고 했다. 나는 개구리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