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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r 19. 2021

나의 몸을 마주하며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이제는 나의 몸 이외의 것들에 눈길을 주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오랜 시간 몸에 갇혀,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좁아졌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주고받는 인사에는 언제나 "몸은 좀 어때?"라는 말이 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끝내 몸에 관해 쓰면서, 사실 그동안 내 몸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 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부정하고 피하고 시선을 거두고, 몸 이외의 모든 것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지난 고유한 에세이 레터 수업 중, 수리 작가님은 록산 게이의 <헝거>를 추천해주셨다. 재작년 겨울 작가님의 수업에서도 같은 책을 추천해주셨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이제야 읽었다. 처음에는 여러 해 전에 겪었던 경험들이 마음을 무참히 괴롭혔고, 갈수록 (거의 울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었다. 솔직하고 명쾌하며 결연한 그의 말들 속에 분명 나의 모습이 있었다.


    아프고 약하고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나는, 타인에게 마구잡이로 기대고 싶으면서도,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내가 내 몸과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관계에서 약자를 자처했고, 혼자 실망하고 체념했으며,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대우이리라 생각했다. 치우친 관계를 반복하며 나는 나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나의 밝은 모습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밝은 만큼 깊은 땅굴을 파는 사람이야."

    유쾌한 나를 보고 친해져 놓곤, 본연의 나를 보고 도망가버릴까 걱정스러워서. 나는 다가오는 이들에게 미리 경고를 한 셈이었다. 사실은 그 깊은 구석에서 혼자이고 싶지 않으면서, 슬플 땐 나를 혼자 내버려 둬 달라고 미리 선을 그었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을 엿보고 난 후에야, 내 몸의 바닥을 경험한 후에야, 내 몸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고, 지긋지긋하게 나를 착취하는 관계를 포기하게 되었다. 아무도 곁에 없더라도, 내가 나의 딛고 설 땅이 되어주겠노라 다짐했다. 설령 자주 흔들릴지라도 말이다.


    그의 고백에서 나는 나를 읽는다. 나의 몸을 읽는다.





[좋았던 문장들]


-이 순간에도 나는 간절히 바란다. [...] 이 몸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 몸이 견뎌온 그 모든 것, 내 몸이 되어온 것 이상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이 책은 내 몸, 내 허기에 관한 책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라지고 싶고 다 놓아버리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원하는, 간절히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사람에 관한 책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면 내 언어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관심에 개의치 않고 내 식대로 하고 싶다. 동정이나 공감이나 조언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용감하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다.


-사실 굉장히 이상한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너무나 구체적인 방식으로 죽음의 가능성에 맞닥뜨리기 전에는 적극적으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많은 일과 써야 할 글들을 떠올렸다,



(이 글은 3월 16일, 인스타그램(@heee.woo)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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