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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r 22. 2021

캘린더엔 적을 수 없는 '아픔 스케줄'

<아무튼, 반려병>을 읽고

 서점에서 아무튼, 시리즈를 구경하다 부제를 보고 집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아파?'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도"라는 부제는 윽, 소리를 내며 심장을 부여잡게 했다. 또 아파? 라는 익숙하고도 매번 낯선 말에 한 번 맞고, 오늘도-라는 말에 가슴이 시렸다.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구나, 보석을 발견한 양 고이 책을 가지고 왔다.


 내가 브런치에 썼던 글들을 다시 보고 있자면, 앞부분에는 병의 원인을 어디서든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인다. 무리했던 시간, 나를 강제했던 사람, 무거웠던 성적표. 그런 것들에서 발단의 조각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헤맨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루푸스는 내게 찾아온 사고라고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일일 뿐이라고, 아무런 원인도, 발단도, 운명도 없다고. 이 책의 작가는 원인 찾기 미로에서 벗어나 '반려병'과 함께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아무튼, 반려병>은 잔병치레로 늘 골골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풀어 놓고 있다. 자신과 일상을 압도하고 짓누르는 병치레에 관해서 생각하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을 방법과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 한다.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찾아 나서는 그의 위트 있는 이야기에 점점 빠져든다.

 이식 후에도 여전히 자주 병원에 가고, 날씨가 흐린 날에는 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침대나 바닥에 붙어 있지만, 나는 이제 골골거리는 일반인을 꿈꾼다. 더 이상 '너 또 아프냐?'라고 내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작가님처럼 "몸아 미안해, 수고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순간이 늘어나기를. 그럴 수 있도록 너무 깊게, 자주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사소한 징후들을 알아채 나를 돌보고, 버려지는 시간 앞에, 캘린더에 포함되지 않는 나의 '아픔 스케줄'에 마음이 축나지 않도록. 생산적인 삶만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반복적으로 말해주기로 한다.

 <아무튼, 반려병>은 꼭 내 얘기 같아서 내가 나의 반려병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자주 들춰볼 것 같다. 나와 같이 어디선가 골골거리고 있을 작가님을 상상하며 조금의 위안도 얻을 것이다.





[좋았던 문장들]

"잔병으로 골골거리는 사람의 고통은 아픔 그 자체가 아니라 '계속' 아프다는 데 있다."


"아픈 것도 모자라 생산적으로 아파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사실 아플 때는 시간이 그냥 버려지는 느낌이 들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내 인생은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가 싶어 두려움에 휩싸인다."


"아픔으로 인해 단수로서의 나는 복수화된다. 스스로에게 '나 또 아프네?'가 아니라 '너 또 아프냐?'라고 따져 묻는 것이다."


"나는 아플 때 그 아픔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아픔을 견디는 사람에 집중한 patient라는 단어가 좋다. [...] 환자라는 말은 나를 비정상적인, 임시적인 범주로 내쫓는 것 같지만, 견디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픔을 누구나 살아내고 있는 일상의 범주로 초대해주는 것 같다. 아플 때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에게 주어진 계절을 그 나름대로 견뎌낼 용기를 준다."


"캘린더 일정에는 없는, 이름 없는 그 긴 시간들을 여기 이 작은 책에 기록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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