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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Nov 30. 2021

때 묻은 마음

14개월에야 첫 발을 내디딘 아이


"잘 지내죠? 컨디션 어때요?"

다정하게 웃는 의사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좋은 대답이 돌아올 걸 으레 안다는 사람처럼. 내게 동생의 신장과 건강을 준 의사, 그리고 1년 넘게 아무런 이벤트 없이 건강하게 지내온 환자. 그와 나의 관계에서라면, 그런 기대쯤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개운한 대답을 내놓은 적 없다. 오늘은 드디어 선생님이 차트에서 눈을 떼 내게 물었다.

"왜왜, 수치 너무 좋기만 하고만!

흐린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하층의 텁텁한 공기 속을 누비며 마무리 짓지 못한 대답을 생각했다. 그러게, 훨씬 좋아졌는데, 왜 이러는 걸까?


나도 모두에게 온몸으로 외치고 싶기도 하다. 동네 사람들! 저는 이제 너무 건강해서 탈이에요! 이 흉터는 영광의 상처랍니다! 글쎄, 어쩐지 훈훈한 기사 사진 속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극복한 환자의 전형'이 되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물론 아직 체력이 온전하지도 않고, 매번 돌아오는 외래 진료에서는 수치가 조금이라도 나빠졌을까 마음 졸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 몸은 편안한데도 그에 맞는 평온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마음이 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탓일까?


나는 너무 오래 아팠다. 몸이 내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 쌓여 어느덧 기본값이 되었다. 내 몸은 내게 신뢰를 잃다 못해 신용불량자에 가까워졌다. 바닥나버린 신뢰 관계에서는 무엇도 거래할 수 없었다. 오래 거래가 끊긴 몸과 마음 사이에 소통이 원활할리 없었다. 여전히 몸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나아진 몸을 보며 뭐라도 잘 해내 보라고 외치는 기분이다. 적어도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서, 일상 속에서 건강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내라고 눈치를 준다.


극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내게 자신의 미래와 건강과 몸의 일부를 떼어내 준 그 애를 위해서라도 나는 건강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1인분의 몫을 해내고, 가족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 무엇보다 자주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분명한 목표에 비해 몸과 마음은 굼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노력하기보다,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 버리고 싶다. 그리고 아무 SNS 앱을 열어서 맥락 없는 글 속을 하염없이 헤엄치고 싶다. 어떤 미래도, 어떤 몸도, 어떤 질병도 더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뭐라도 시도해보려고 하면 떠오르는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는 몸을 해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까? 병을 키우지도 않고, 동생의 신장을 잘 지켜내면서? 그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 무엇도 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리고 그런 나를 못마땅해한다. 아픔의 흔적을 훌훌 벗어버리고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러다가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비슷한 속도로 흐른다. 두 흐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선택을 포기하고 드러누워 버리고 만다. 선택의 근거가 되어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무릇 자신감이란 작은 성취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사실 이 모든 걱정의 답을 나는 알고 있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내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안다. 밥을 건강히 챙겨 먹고, 꾸준히 운동해서 체력을 기르는 것. 몸의 경험이 바로 서야 그다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받아 볼 수 있고, 당장 눈앞에 놓인 밀가루 음식과 구운 고기들은 몹시 유혹적이고, 힘든 운동보다는 침대가 훨씬 가까이 있어서 여전히 나는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으로만 남아 있다. 내가 핑계만 대고 게으른 사람인 걸 스스로에게 들킬까 봐 몹시 불안하고 불편하다.


2주 전에 완성한 새 책의 원고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조급해지는 나도, 그런 나를 꾸짖는 나도 이제는 모두 안아줄 수 있다."

그때의 나는 참 좋은 말을 적었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게으름에 빠진 나조차 내가 안아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글에 이런 말도 적혀 있다.

"내 마음에게 단호하게 항변한다. 나의 새 삶은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다고. 더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고."

그때의 나는 어쩌면 이런 나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나는 지금의 내게 뭐라고 말해줄까? 모르는 사람인 듯 나를 상상해본다. '아픈 나'를 인정하는 것만도 꼬박 10년이 걸렸다. 당장은 아프지 않지만, '동생의 신장을 오래 지켜내야 하는 나'에 적응하는 것도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겠지. 10년간 같은 병으로 아팠지만 이건 또 새로운 길이니까. 새롭게 태어난 나는 고작 한 살일 뿐이니까, 조금 서툴고 두려워도 괜찮다고, 또 아기처럼 잠만 자거나 마음이 자주 넘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지금의 나도 내게 좋은 말을 건네본다.


엄마가 내게 자주 말해주었던 기억 한 조각도 곁들인다. 겁이 많아 14개월에야 첫발을 내디뎠던 나. 그러나 첫발을 내딛자마자, 넘어지지도 않고 아주 어린이가 된 것처럼 걸어 다녔다고 했다.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나처럼, 지금도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시기인 거겠지. 세상에 나서는 첫발을 떼는 것은 두렵고, 그렇다고 오늘의 실천을 해내기에는 아직 벅찬 나이, 고작 한 살.


어쩌면 이 긴 겨울을 보내고 나면 씩씩한 어린이가 되어 세상을 누비고 다닐지도 모른다. 오래 전의 나를 믿고, 오늘은 조금 더 나를 껴안는다. 어떤 모습이든 나라는 이유로 충분히 안아주어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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