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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Dec 07. 2021

ESTJ, 계획 인간의 견고한 세계

어쩌면 그게 널 지켜줄지도 몰라.

나는 ESTJ였다. 요즘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MBTI 검사로 나를 정의해보자면, 나는 "엄격한 관리자" 유형의 인간이다. 오랜 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규칙과 계획을 세워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열다섯 살에 학교에서 처음 검사를 해봤던 기억이 또렷하다. 완전 나잖아, 라면서 스스로를 확실하고 온전하게 관리한다는 것이 몹시 뿌듯했더랬지. 그 후로 성격은 다소 변했지만, 성장 서사의 주인공으로 나를 다루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많은 걸 통제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까지 기억력이 미쳐야 한다. 올 초에 세워두었던 버킷리스트와 5년 계획의 한 조각인 올해의 계획과 그를 위한 오늘의 거시적 계획, 그리고 자잘한 일상 체크 리스트들까지. 생일과 전화번호와 금액 같은 연속된 숫자들도 척척 외웠다. 큰 틀 안에서 내가 정해둔 스텝들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은 즐거웠고, 살림을 꾸리듯 일상을 꾸미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잘 기억해서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나는 또렷이 기억하는데 상대방은 기억하지 못해서, 나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적은 게 서운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쳐도 때로는 담당 의사에게도 화가 났다. 원래 주치의였던 선생님이 연구년을 가시고 잠시 다른 교수님 진료를 볼 때였다. 분명 지난 진료에서는 A, B 검사를 둘 다 시행했고 검사 결과가 안정적이니 이대로 가도 좋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만나자 돌연 B 검사를 안 했으니까 지난 검사를 확실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에 말했던 자잘한 증상을 반대로 알고 있기도 했다. 그는 수백 명의 진료를 보는 사람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 따라 돌변하는 나의 투약 혹은 진료 계획을 생각하면 절로 성이 났다.


늘 날이 서 있었다. 내 세계가 너무도 정확하고 치밀해서 남의 잘못이 몹시 커 보였다. 강약 조절 없이 매 순간이 또렷한 건 피곤한 일이었다. 인생은 언제나 내 맘 같을 수 없고, 불현듯 폭탄 같이 터지는 불행들이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다. 나라는 계획 인간은 그 속에서 긴장하고 불안해했다. 자주 이를 꽉 깨물고 자서 아침이면 턱이 아팠고, 긴장 상황에서는 숨을 잘 쉬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첫 문장이 과거형인 것처럼,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짧은 인생 중 가장 아팠던 날 이후, 계획 인간인 나는 수차례 흔들렸다. 병원에서 환자는 그저 몸이 될 뿐이고, 너무도 바쁘게 돌아가는 그들의 시스템에 나는 언제나 수동적으로 일정을 맞춰야만 했다. 내 계획과는 달리 생각보다 몸이 잘 나아지지 않았다. 많은 약과 항암치료 때문일까? 맑았던 기억력조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성과 사실 여부보다 감성이 더 앞서서, 자주 울게 되기도 했다.


그 후 MBTI가 유행이 되면서 친구들과 여러 모임에서 다시 검사를 하게 됐다. 너는 어떤 유형이야? 너는 어때? 하는 물음에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싶어서. 그러나 어쩐 일인지 검사할 때마다 가운데 두 글자가 다르게 나왔다. E○○J. 나는 E와 J만 확실한 유형이었다. 아픔과 함께 변하는 나를 더 잘 알아채고 싶어서 16가지 유형 중 나는 누구인가를 자주 찾아보았지만, 어느 날에는 ESFJ, 또 어느 날에는 ENTJ …. 나는 어느 하나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았다.


변하는 MBTI 유형과 함께 크고 작은 것을 자주 잊었다. 남자 친구와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잊어서 그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우리 저번에 갔던 식당 있잖아,라고 그가 말하면 나는 언제? 어디였지? 아... 뭘 먹었었지? 하며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힌트를 캐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내가 애쓸수록 그는 점점 더 서운했겠지. 최근에는 친구들과 약속 날짜를 바꾼 것을 까맣게 잊어버려서, 마음마저 까매지기도 했다.


계획 인간의 관성으로, 잊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적고, 또 적는다. 이 글도 샤워하다가 생각난 문장들을 잊어버릴까봐 로션도 바르지 않은 채 시작한 글이다.


조금 두려웠다. 이렇게 점점 다 잊어가면 어쩌지? 내게 시작된 것이 찰나의 건망증이 아니라, 끝이 없는 망각일까 겁이 났다. 다행히 아직 그 정도라고 말하기엔 가볍지만, 여전한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가벼운 증상은 나를 더 탓하게 만든다. 내가 주의를 덜 기울여서 그런가? 예전에 내가 서운해했던 대상 중 하나가, 이제는 나인 건 아닐까?


얼마 전 좋아하는 어른과 함께 가을 날씨를 걸으며 이런 고민을 조심히 꺼냈다.

"자꾸 잊어요, 선생님. 예전에는 뭐든 또렷했는데요."

선생님은 담담하게 누구나 다 그래,라고 운을 떼며 답했다.

"어쩌면 그게 널 지켜줄지도 몰라. 너무 또렷하고, 너무 잘 알겠어서 속상하고 화나는 일도 많잖니. 조금 흐리면 마음이 더 가벼워질 거야. 세상 사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단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세상이 조금 흐려진 대신, 나쁘게 차오르는 감정을 금세 까무룩 잊었고, 기쁨은 흐려지며 번져나가 더 오래 머물렀다. 긴장하고 나를 조이던 옷보다, 더 편안한 옷을 입은 것도 같다. 이 옷은 나를 편안히 숨 쉬게 하고 긴장했던 턱에도 여유를 준다. 전형적인 ESTJ 인간의 견고한 세계는 이제 무너졌다. 그런데 나는 그 잔해들 속을 즐겁게 밟아나가며 편안하다. 아무렴, 좀 또렷하지 않으면 어때? MBTI가 뭔지 확실하지 않으면 어때? 나는 여기에서 느슨하게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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