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보다 라디오에!
“여러분은 지금, 스위티 스페셜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월요일 점심시간이면 교내에 울리는 내 목소리. 직접 쓴 원고와 신중히 고른 노래들. 그게 내가 자발적으로 썼던 첫 원고였다.
학창 시절에 주로 뭘 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방송부!”라고 외칠 정도로 방송반을 좋아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 시간 일찍 등교해서 등교 시간 음악을 내보냈고, 앰프에 앉은 먼지를 털었다. 점심시간에는 첫 번째로 식판을 받아 국물이 넘칠락 말락 내달려 1층 방송부실로 내려왔다. 그리고 요일마다 달라지는 시그니처 시작 음악을 틀면 나만의 세상이 열렸다.
아무도 내 멘트에 관심이 없대도, 아무도 사연을 보내지 않는 배경음악에 불과한 방송이라도 상관없었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고, 내가 고른 음악이 누군가의 마음을 울린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간혹 방송부실 옆 작은 편지함에 “어제 노래 참 좋았어요”라든가 “방송에 나온 멘트에 위로받았어요” 같은 쪽지가 들어 있는 날은 드물어서 소중했다. 그런 날에는 방송부 친구들과 돌려보며 쪽지를 구깃구깃 윤이 나게 만들곤 했다.
매일 선배들의 지도를 받아 원고 쓰는 연습을 했고, 하교 후에는 발성 연습이랍시고 운동장을 돌거나 제자리 뛰기를 하며 배를 눌러가며 소리를 질렀다. 아나운서들이 한다는 입 근육 풀기와 볼펜 물고 발음 연습, 어려운 문장 발음 외기, 거센소리 발음에서 발음이 튀지 않게 만드는 연습 등 갖가지 특훈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실없이 웃음이 터질만한 일들이지만 그때에는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인 듯 몹시 소중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방송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학생회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와 학원 버스에서 “진짜 꿈은 뭐야?”라며 속마음 대잔치를 벌였다. 그러니까 좋은 대학에 가는 거라든가 돈을 많이 벌어서 집 사기. 그런 시시한 목표 말고 진짜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 무어냐고. 어쩌면 그때만 가능했던 순수함과 진지함을 담아 물었다. 친구는 영화 평론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뭐가 되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라디오를 진행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나운서든 연예인이든 혹은 피디나 작가가 되어도 좋다고. 그저 라디오를 언젠가 꼭 한 번 진행해 보고 싶다고 말했던 밤이 여전히 생생하다. 버스 안 매캐하고 눅진한 공기와 흔들리는 차창 밖 번지는 불빛, 내 쪽으로 돌아앉은 친구와 앞 좌석의 가죽 시트까지 또렷이 떠오른다. 속마음을 다시 덮어두고 “대학부터 가자”라고 말하며 흐릿하게 웃었던 그 밤.
그 밤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나 며칠 전 아침. 라디오에서 낯익은 문장들이 들려왔다. 김창완 아저씨가 나의 글을 특유의 담담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읽어주셨다. 내 문장을 누군가 소리 내 읽어주는 일이 이렇게 맘을 울리는 일이구나. 가슴이 두근두근, 발성 연습 중 운동장을 내달리던 어린 나의 심장처럼 크게 맘이 울렸다. 누군가 내 목소리도 이렇게 애틋하고 설레는 맘으로 들어주었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시멘트 계단을 도도도 뛰어 내려가 방송실 문을 열어젖히고 싶었다. 설레고 신난 마음으로 그 문을 열자 귓가로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사랑,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는 희우의 <당연한 하루는 없다>를 읽어 드렸습니다.”
라디오 다시 듣기: https://m.programs.sbs.co.kr/radio/morningchang/aods/57608
12/23 방송. 시작 후 40분쯤에 나온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