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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결 Sep 12. 2023

다정함의 가치

레드 노트 (불안 속에 나를 찾던 일기 모음)

Unsplash의rawkkim





   그런 날이 있다.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멀지 않은 곳에 사고가 나서 길이 막히는 날. 시원하게 맥주나 마시려고 편의점에 갔건만, 계산대 줄이 만리장성인 날. 이렇게 머피의 법칙이 연이어 터지는 순간들이 일상엔 참 많다. 그러나 아주 가끔 일이 꼬이기만 하는 순간들이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선물하기도 한다.

   퇴근 후 편의점에 들렀던 날이었다. 집에 두고 먹을 간식을 고르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계산대 줄이 줄어들지 않아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쉬고 싶은데 이마저도 안 도와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계산대 줄이 밀렸던 이유는 단순했다. 맨 앞줄에 있던 부부가 축구 경기 보면서 먹을 치킨을 많이 구매했기 때문이다. 직원은 따뜻한 치킨을 꺼내서 서둘러 담기에 여념이 없었고, 부부는 슬슬 뒷사람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줄이 이렇게 밀려서 어떡하죠?


   난처한 얼굴로 사과하는 그를 향해 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손님이 복덩어리셔서 매장에 이렇게 많은 손님을 몰고 오셨나 봐요.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살면서 그렇게 센스있는 답변은 처음 들어봤다.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답변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낸 태도를 보고 깨달았다. 아, 이런 사람이야말로 다정함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구나.






   세상엔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를 심도 있게 배우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은 금세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다정한 심성을 지녔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학식이 높다고 인성이 따라오는 건 아니라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은 탓이다. 학창시절에 집 근처 치과에 갔던 날이었다. 신경을 죽이는 시술이 너무 아파서 절로 눈물이 났다.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 보며, 치과 의사는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네가 치아를 잘못 관리해놓고 왜 우니?


   치과 의사 이후로도 내 편견이 깨진 적은 여러 번 더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양 교수님 한 분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는 자신과 의견이 맞는 글을 써낸 학생은 B학점 이상 주고, 의견이 다른 글을 써낸 학생 모두에게 D학점을 줬다. 학점에 이의를 제기한 모든 학생의 메일을 무시하는 건 물론이었고, 기껏 답변한 몇몇 메일마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희들이 글을 잘못 쓴 거겠지. 내 탓은 아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메일 보내지 말라고 전해. 메일 안 읽을 거니까.


   남 탓과 조롱으로 가득했던 그 메일은 당시 학부생들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단지 분노만으론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많은 학생은 납득할 수 없는 학점에 억지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남들보다 더 배웠다고 해서 무조건 사람답고 다정한 건 아니라는 걸. 그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반면교사의 롤모델이 되고 말았다.






   맨 앞줄에 있던 부부가 편의점을 나서고 난 이후, 계산대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됐을 때 편의점 직원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이건 서비스니까 하나 가져가세요.


   살가운 말투로 건네준 건 작은 사탕이었다. 누군가가 보기엔 별거 아닌 사탕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의미가 달랐다. 소극적인 성격 탓에 초면인 사람에게 절대 말 한 번 걸지 않던 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정말 친절하시네요. 손님을 기분 좋게 응대하는 법이 어떤 건지 아시는 분 같아요.


   그는 수줍게 웃으며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집에 돌아가면서 해당 편의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칭찬 직원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내가 그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순 없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다정함이 보상받길 바라서였다.

똑똑한 이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한 이는 갈수록 찾기가 어렵다. 그날 내가 구매한 것은 제품이 아니라, 다정함의 가치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다정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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